내가 육아를 함에 있어서 다른 아빠들보다 낫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가족과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얼마나 잘 보살피는지 얼마나 잘 놀아주는지는 수치화하기가 어렵지만 시간은 숫자로 확실히 드러난다. 첫째가 네 살이 되면서 어린이 집에 가기 전까지 대략 1000일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고 하면 그중에 800일 정도는 셋이 하루 종일 부대끼고 있었던 것 같다. 일 년 365일 중에 300일 정도는 삼시 세 끼를 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먹었다고 보면 되는데 그러고 보면 나나 아내나 참 사람들 안 만난다.
이렇게 집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건 물론 내가 하는 일의 특성상 가능한 일이지만 공휴일 대비 집에 붙어 있는 날의 비율로 계산해봐도 내가 보통 아빠들보다는 훨씬 집돌이긴 한 것 같다. 일반 직장인들 일 년에 공휴일 + 연차가 보통 130일 정도일 텐데 그중에 100일 이상을 하루 종일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은 거의 못 봤으니까.
간혹 이미 아빠가 된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약간 역적이 되는 분위기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고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라는 눈길로 받기 일수다. 나 역시도 편하게 약속을 잡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내 시간을 조금 더 편하게 가지고 싶은데 그건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라 쉽지 않다.(아빠와 엄마의 자유시간은 거의 동일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데 이건 다른 글에서 길게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이유로 아이와 긴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난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꽤나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아기는 아빠랑 잘 놀다가도 졸리거나 아프거나 불편하면 엄마를 찾는다는데. 그게 본능일까? 아니면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일까?’
본능적으로 계속해서 엄마를 찾는다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먹이고 재워도 결국에 아쉬울 때면 엄마한테 갈 텐데 그건 너무 섭섭할 것 같은 기분.(물론 아이가 태어난 후에 보채면서 엄마를 찾으면 안도의 한숨을 쉰 적도 있습니다만). 그래서 최대한 붙어 있으면서 아이가 나에게 익숙하게 만들려고 마음을 먹었다. 우선 출산 후 2달 정도 스케줄을 통으로 비워 시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조리원에서부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집에 온 후에 밤 수유와 목욕, 기저귀 갈이 등을 거의 도맡아서 했다. 물론 밤을 새우고 나면 뻗어버리기 일수라 오전 시간에는 함께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런데 출산 전의 굳은 결심이 없었더라도 아내의 산후조리 때문에 신생아 시기의 육아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 같다. 능동적인지 수동적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
이렇게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마와 더 가까운 아이 모습에 약간의 승부욕까지 생겨버렸다. 원래 난 보통 승부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성격이다. 농구나 축구 같은 운동은 꽤나 즐기지만 그냥 땀 흘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편이라 팀원들에게는 조금 미안할 수도 있지만 승리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호승심을 자극하는 상황이 있긴 하지만 자주 생기는 일은 아닐뿐더러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상황도 잘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남자들의 쓰잘 떼기 없는 승부욕이 이상한 곳에 발동했다. 아이에게 잘하겠다는 뜻이니 쓰잘 떼기 없다는 표현은 잘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승부욕까지 필요한가라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적당한 선이 좋지 않았을까 한다. 어쨌든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살을 비비다 보니 아이와 굉장히 가까워졌다. 나만 보고 웃어주는 일도 잦았다. (운 좋게 걸린 배냇짓이었겠지만 날 향한 미소였다고 믿고 있다.) 칭얼댈 때도 나름 잘 달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빠도 노력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육아를 하던 어느 날 그런 생각은 와르르 무너졌다. 생후 80일쯤 아이가 정말 많이 아팠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증상은 배앓이와 비슷했다. 겪어본 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배앓이가 오면 아이와 부모 모두 정말 괴롭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시간의 흐림을 바꿔놓는 능력이 있다. 아이가 울 때 30분 정도 지난 것 같은 느낌에 시계를 보면 실제로는 채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가 있다. 이건 시간의 왜곡은 아무리 육아를 오래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배앓이가 있는 날에 아기는 보통은 2~4시간 정도를 팽팽한 활시위 마냥 몸에 힘을 주고 울어댄다. 작은 몸으로 두 주먹을 꽉 지고 바르르 떠는 아이를 바라보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질지 상상해보라. 아기가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울는지 안고 있는 양 팔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온 힘으로 버티는 아이를 꼭 안아주는 건 체력적으로도 너무 힘들다. 그런데 그런 힘든 시간이 오자 아이는 엄마 품에서 더 편안해했다. 아내가 안자 마자 아이가 배앓이를 멈추고 편안히 잠들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품에서보다 아내의 품에서 아이의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나고 나자 몇 까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우선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아이와 엄마 사이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 살을 비비는 수준이 아닌 9달이 넘는 시간을 한 몸으로 있었던 사이었던걸 간과했다. 시간으로 비빌 생각이었다면 나도 하루에 16시간은 아이를 돌보고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엄마가 버젓이 옆에 있는데 내가 하루 종일 그러는 건 웃기를 일이거니와 또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실히 깨달은 건 내가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최선의 육아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빠로서 아이와 함께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아빠와 시간을 많이 보낸 아이들의 장점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다들 무의식적으로 그게 좋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엄마의 컨디션을 최선으로 끓어 올려주는 게 아이에게는 훨씬 좋을 때도 있다. 안타깝게도 아이가 어릴수록 신나는 놀이시간보다는 편안한 휴식시간을 원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휴식시간에는 아빠보다는 엄마와 있는 게 효율이 좋다. 데이트가 됐건 자부 타임이 됐건 선물이 됐건 어떤 식으로든 아내의 기분과 몸상태가 좋게 만들면 그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아빠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건 엄마에게 재충전의 시간까지 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니 확실히 좋긴 하군.
물론 이건 아기가 2~4시간 텀으로 먹놀잠을 돌릴 때의 이야기다. 두 돌 정도를 지나면서 아기의 단계를 벗어나 무한체력 아이의 단계에 들어가면 상황은 조금 바꿔서 아빠가 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때는 아이도 적당히 세상을 알게 된 터라 아기 때만큼의 완전무결한 양육의 느낌은 아니라 조금 성에 안 찬다. 뭔가 아이도 약간 불편하고 뭔가 아쉽지만 지금은 몸을 좀 쓰고 싶으니 아빠랑도 한번 놀아볼까의 느낌이다. 엄마와 아빠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린 영악한 것...
간혹 조연이 주연보다 빛날 때가 있다.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건 아니면 극적인 전환을 이끌어내든 잔잔하게 극에 무게를 더해주든 빛나는 조연은 극을 풍성하고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내가 주연이 아니면 어떠랴. 가족이 행복하다면 역할의 비중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래도 주연의 부담을 덜어주려면 비중이 큰 조연인 게 좋다. 그리고 조연이 빛나는 영화치고 졸작은 그다지 없으니까. 이렇게 아빠는 집돌이가 됐다.
그때부터 생긴 생활패턴 때문인지 둘째가 태어난 지금도 첫째 때만큼의 시간을 둘째와도 보내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둘째를 만나고 나서 첫째가 엄마 껌딱지가 돼버려 상대적으로 둘째는 내가 감히 주양육자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보낸다. 이제 주연 자리 한번 꿰차 보나 기대가 될 때쯤 어차피 때 되면 자기 품을 더 찾게 돼있다고 말하는 아내가 얄미운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