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살던 때를 떠올리면 항상 5살 때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 왜일까? 아빠와 함께 살던 시절, 그 시간이 나는 제일 행복했었나? 엄마 말에 의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집 형편이 괜찮았다고 한다. 당시 엄마는 그래도 우리 집이 중상위권이라고 생각했었다고. 물론 그건 착각이었다고 엄마는 덧붙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행복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5살, 조그마한 나는 13평 비좁은 집안에서 색연필로 벽에다 그림을 그렸다.
아침에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출근했던 아빠는 어둑한 저녁이 되어야만 집에 돌아왔다.
“아빠 왔다!”
엄마나 아빠가 소리치면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나는 뛰어나와 아빠한테 안겼다. 아빠 목을 끌어안고 아빠 얼굴에 내 얼굴을 비비면 까끌까끌한 턱수염이 느껴졌다. 아빠에게 안긴 채 일부러 손바닥으로 아빠의 턱수염을 만져보기도 했다. 예전엔 턱수염이란 아빠만 가지고 있는 건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증조할아버지는 더 이상 턱수염이 나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매일 말끔히 면도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셨기에 할아버지들에겐 턱수염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좀 더 커서는 아빠는 면도를 아예 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아침에 아빠를 배웅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수염이 자라나는 거라니…. 이것도 사실 최근에 알았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날 땐 아빠에게 관심이 없었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별거를 시작했다. 그때도 아빠에겐 별다른 애정이 없었다. 아침에 아무리 말끔하게 면도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런저런 수고를 더하면 남자는 턱에 턱수염이 돋는다. 퇴근 후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다가 깨달았다.
“갑자기 수염이 많아졌네?”
“원래 스트레스받으면 남자는 수염이 나. 그래서 오후엔 덥수룩해져.”
남자친구는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이제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날 그의 하루가 얼마나 고되었는지 맘속으로 체크 한다. 생각보다 수염이 많이 돋지 않는 때도 있었고, 유독 구레나룻과 턱밑을 이으며 덥수룩하게 수염이 돋아나 있을 때도 있었다. 나는 이제 아빠가 아닌 남자친구의 수염을 가만히 만져보고 일부러 내 얼굴을 대어보기도 한다. 까끌까끌.
이어령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 단어를 처음 보았다. 파이브 어 클락 섀도(five o’clock shadow).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고독의 신호가 있다네. 파이브 어 클락 섀도five o’clock shadow라고 들어봤나? 샐러리맨들이 오후 다섯시가 되면, 깨끗했던 턱 밑이 파래져. 퇴근 무렵, 면도 자국에서 수염이 자라 그림자가 생기네. 그게 오후 다섯시의 그림자야. 매일 쳇바퀴 돌 듯 회사에 나와 하루를 보내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오후 다섯시. 수염 자국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지면 우수가 차오른다네. 오늘 뭘 했지? 내일도 또 이렇겠지. 다시 전철을 타고, 술집에 가고, 이윽고 집에 돌아가 아내를 만나고…… 그게 샐러리맨의 고독이지.
- 이어령,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2023, 91쪽.
그 시절 잘 기억나지 않는 아빠의 피로를 우연히 남자친구의 얼굴에서 발견한다. 그 시절의 아빠와 지금 남자친구의 나이대가 비슷한 탓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나는 남자친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아빠 얼굴과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아빠를 미워하던 때엔 아빠 같은 사람은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었는데. 아빠와 남자친구의 성격이 닮았다고는 생각 들진 않지만, 어쨌든 둘은 굉장히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아빠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미워한다고 말은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감정은 미움이 아니라는 것을, 난 알고 말았다. 지금보다 아빠와 더 연락하지 않았던 24살, 나는 졸업을 준비하며 연극동아리에서 마지막 연극을 연출로서 준비하고 있었다. 첫 공연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많은 이들이 꽃다발이나 케이크를 들고 나를 축하해주러 왔다. 이곳저곳에 공연 소식을 전했지만, 아빠에게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공연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가 시작될 무렵 아빠가 나를 찾아왔다. 관객이 다 빠져나간 공연장 건물 앞에서 아빠를 마주쳤다. 아빠는 내게 공연 잘 봤다고 말하며 이제 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빠가 공연을 보러 올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 했기에 맨 처음, 아빠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의외의 장소에서 아빠를 만난 것이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울 타이밍이 아닌데 왜 눈물이 나는 건지 몰라서 나는 또 당황스러워지고 말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보던 아빠는 내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주고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큰길로 나가는 아빠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알았다. 아빠는 아직도 나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라는 걸. 나는 아빠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지금은 한 달에 두 번씩 아빠를 만나 저녁을 먹는다. 아빠와 만날 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젠 그 마음은 미움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아빠에게 애정을 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가끔 내 일에 바빠 아빠를 신경 쓰지 못할 때면 남자친구가 먼저 아빠 좀 챙기라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그의 면박을 들으며 나는 이 두 남자가 나중에 서로 만났을 때 어떤 그림이 펼쳐질지 상상해본다. 두 남자의 파이브 어 클락 섀도. 어쩌면 나는, 이 닮은 두 남자가 공유하는 하루 중 오후 다섯 시 그 시간마저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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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브 어 클락 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