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살 싱글언니 시간여행 (13)
구멍 뚫린 하늘 아래 친퀘테레 우비 여행
1년 전 오늘은 이탈리아 지중해 해안 절벽 마을 친퀘테레 중 몬테로소알마와 베르나챠 두 마을을 보러 가기 위한 날이었다. 이 마을들은 내가 머물고 있던 마날로라 마을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눈으로도 보이니 마을이 산동네만 아니면 걸어서 20분이면 갈 마을이다. 하지만 친퀘테레 마을 전체가 해안가 절벽 마을이어 등산을 할 경우 두어 시간, 그리고 대중교통은 기차로만 가능하기에 기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로 3~4분 진짜 가깝다.
피사의 탑을 보러 갔던 전날과는 달리 이 날은 창 밖에서 빗소리는 유달리 더 크게 들렸다. 바닷가여서 그런지 유악 더 크게 들렸다. 우산도 없는데 막막했다. 그렇다고 창 밖 비만 쳐다보면서 숙소에 머물러 있기에는 시간도 돈도 아까웠다. 폭우여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는 하루를 그냥 버릴 것 같아 그냥 작은 가방을 메고 문을 나섰는데 길거리에 우비를 가고 기차역으로 가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기차역으로 가는 도중 우산을 사기 위해 작은 선물가게에 들러 국민학교 때 이후 처음으로 우비를 사서 입어봤다. 우산으로만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아 나도 길거리 배낭여행객처럼 우비를 구입한 것이다. 우비를 사는데 이 조그만 구멍가게 같은 선물가게 여자 사장님이 날씨가 안 좋아서 여행하기에 힘들 텐데 너무 안타깝다며 나를 토닥인다. 춥고 비 오는 날 이 분의 말 한마디가 추웠던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 주었다. 우비를 입고 기차를 타니 기차에는 나랑 비슷한 우비를 입은 여행객들이 눈에 띄었다. 기차 창문에 나의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우비소녀.
이렇게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쓰고 몬테로소알마에 도착하여 걷기 시작하는데 비는 점점 더 거세어졌다. 바닷가여서 바람도 심하게 불고, 이런 날에 돌아다녀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여행지에서는 비가 와도 여행을 한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낭 여행객들은 나처럼 우비 여행을 할 것이다.
폭우 속에 해안가를 걸으니 걷기에는 길도 미끄럽고 힘들지만 나름 비바람에 파도치는 해안가는 이쁘다.
해안가를 따라 마을로 올라가 보니 비에 젖은 길도 마을도 아늑하고 예쁘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따로 없는 듯했다.
비 오는 날에도 이 마을 한 바퀴를 둘러보는데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오전 9시 넘어 출발했는데 점심시간까지 할 게 없었다. 그래서 다시 기차역으로 발을 돌려 친퀘테레의 또 다른 마을 베르나챠에 걸어갔다. 기차역으로 가는 중 보지 못했던 해안가 절벽 바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폭우 속 절벽 바위 풍경 그냥 짠했다. 절벽에 만들어진 사람 모양의 동상. 어깨에는 또 다른 무거운 다리를 메고 폭우를 견디어 내는 모습에 그냥 울컥했다. 비 오는 날 우비 맞으면서 그냥 이렇게 걷고 있던 나 자신이 초라하고 거지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 동상을 보니 이 동상에 비하면 내 신세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 거친 비바람을 맞으면서 꿋꿋하게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동상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위로를 받으면서 나는 그다음 마을 베르나챠로 향했다.
베르나챠는 몬테로소알마레와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몬테르소알마레는 직선같이 정렬된 느낌이었다면 베르나챠는 그냥 자연 그대로 곡선의 분위기 같았다. 그냥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거기에 아무런 조미료를 치지 않고 그 위에서 사는 것처럼 보였다.
집들도 신기했다. 그냥 바위 위에 바위 아래는 물이 흐르고 바위 구멍에 집에 들어가 지어진 집 너무 신기했다. 베르나챠는 해안가 마을도 아기자기, 정감 가는 부둣가 마을이었다.
이 부둣가에서 나는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들어섰는데 비가 와서인지 식당 안에는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음식을 뭔지도 모르면서 시켰는데. 왠 걸? 멸치튀김이 보였다.
한국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멸치튀김을 이탈리아에서 먹을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여행지에서 그것도 비 오는 날 부침개 대신 멸치 튀김을 먹다니.. 그런데 부침개보다 멸치튀김이 더 감 칠 났다. 추웠던 내 몸을 멸치 튀김이 따뜻하게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이 날 나는 코르닐리아르 들리고 저녁 때 즘 기진맥진한 상태로 나의 숙소인 마나롤라에 도착했다. 숙소 근처에 오래간만에 약국에 문이 열려 혹시 모를까 봐 아스피린을 구입했다. 내가 아는 약이라고 아스피린 밖에 없어 혹시 열나고 머리가 아플까 봐 약국에 들렀다. 여행지에서 아프면 안 되기에 생존을 위해 아스피린과 챙겨 오지 못한 얼굴로션과 세안제를 구입했다.
세안제가 없어 바디워서로 며칠 세안을 했으니...
비 오는 날 반백살에 진짜 배낭여행객처럼 여행을 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니 그냥 웃음밖에 안 나왔다.
거지같이 하고 다니던 배낭여행이었지만 1년 뒤 오늘 돌아보니 그 여행도 다시 가고 싶다. 1년 뒤 오늘 나는 여전히 칸트처럼 오전에 도서관 가기 전 공원을 들렀다. 이렇게 공원을 걸을 수 있다는 자체도 작은 선물이었다. 걷다가 공원 내 화장실 내 유리창에 보인 나의 모습을 보니 1년 전 오늘은 우비를 쓰고 사진을 찍었지만 1년 후 오늘은 또 추위를 감싸줄 모자를 쓰고 다니고 있다.
이 모습이 그다지 싫지 않다. 꾸미지 않는 모습은 1년 전 오늘이나, 지금의 오늘이나 아마 1년 후 오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아침운동을 하고 도서관에서 맞이하는 나의 하루 시작. 도서관 계단에 이렇게 쓰여있다.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그래! 난 지금은 거지처럼 초라하지만 난 오늘 눈 부시게 살 거야.
이렇게 나에게 말을 건네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1년 후 오늘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