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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Aug 07. 2020

고급 외제차를 박았다

벽 - 서울살이

오래 전의 일이다.


날씨가 차츰 선선해오는 여름 끝의 가을 초입 일요일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날, 둘째를 임신한 아내가 입덧 중에 커피가 먹고 싶다고 했다.


동네에 새로 생긴 유명 커피 브랜드 점으로 차를 몰아 첫째 아이와 함께 세 식구가 함께 갔다.(엄밀히 얘기하면 뱃속의 둘째까지 갔으니 네 식구였다.)

커피도 마시고 작은 케이크도 먹었다.

물론 아내는 커피를 다 마시지는 못 했다.


커피와 케이크를 먹은 뒤, 나는 주차장에서 차를 빼기 위해 후진하고 있었다. 

그 해 나는 가을야구를 하지 못하는 야구팀의 팬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팀의 진정한 팬답게 그날도 그 팀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다만 응원의 시기와 방법이 문제였다.

후진 중에 틀어놓은 휴일 야구 경기.

띠띠띠-


후방 감지 카메라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꼴찌팀의 팬심이 깊은 내가 그 소리도 못 듣고 내비게이션 DMB의 야구경기에 한눈을 팔았다.


쿵.

둔탁한 저음의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x 됐다.”

뒷 차의 브랜드 마크를 보고 내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너무 당황했고, 순간 몸이 얼었다.

잠시의 수소문 끝에 그 차의 주인이라는 분과 마주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오십 대쯤으로 보이는 그 남자 앞에서 말을 더듬거렸다. 


“제가 사장님 차를.. 후진하다가..”

“내 차를.. 뭐요? 어떻게 했단 거예요..?


차의 상태를 확인한 그가 내게 쏘아댄다.

“이게 조금이야?”

“이 차가 얼마짜리인 줄이나 알아? 일억수천만 원이야!! ”


“죄송합니다.”

“지금 우리 딸 대학 면접 보러 가는 길인데.. 재수 없게!”

“죄송합니다. 액땜하셨다고 생각 좀..”

상황을 보다 못한 아내가 집에 먼저 가겠다 하여 먼저 보냈었다.


무용학과 실기 면접을 본다는 그 딸이 내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얘기한다.

“저 차 ***(차 이름)인데...”

뒤로 가다듬은 머리와 약간의 화장기가 있는 걸 봐서는 무용과 면접 보러 가는 학생은 맞는 것 같았다. 


더 창피했던 건

후진 중 살짝 받은 그 차의 흠집은 선명했지만

접촉사고 흔적이 많은 내 차의 범퍼는 어느 쪽으로 가해를 입힌 것인지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너 없어 보여’라고 내 차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상대 차의 보험사 담당자가 이것저것을 확인하는 동안,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

잘못한 쪽은 나였으니 빨리 해결하고,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때 왜 그렇게 고분고분 저 자세로 대응했을까. 

고분고분하게 하면 보험료라도 싸게 견적 받아 줄 거란 이상한 동정심 유발이라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일억수천만 원이라는 차 값의 위용에 눌렸던 것일까.


한참 동안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억수천만 원


휴학 한 번 없이 대학을 졸업해 스물일곱에 처음 대기업에 입사해서 서른 중반 결혼할 때까지 준비해 겨우 서울 한쪽에 작은 신혼집을 마련할 때의 그만큼이었다.

제대로 휴가도 못 가고, 사람 조금 만나고, 밥도 조금 사 먹고, 술은 조금 좀 먹고, 모았던 그만큼.

자기가 모은 돈으로 결혼 준비를 한다고 부모님을 우쭐하게 했던 그만큼


그의 그 말을 듣는데 왠지 열심히 살아온 내 인생이 부정당한 기분이 들어서 한참 동안 우울하기도 하였다.

악덕 지주, 졸부... 학창 시절 알았던 못된 말들만 떠올랐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벽’을 실감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벽.

그걸 눈앞에서 받아 들여야 했던 것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벽들을 만나고 살아가게 될까

‘넘사벽’을 눈으로만 보고 있다가, 그 벽에 내가 실수로 잠깐 흠집이라도 내면 나는 정말 ‘재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이십 대부터 살고 있는 이 서울이라는 공간은 곳곳에 그런 벽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다른 곳보다 더 세차게 무수한 벽들로 감싸아진 공간.

살고 있는 곳의 주소만 알아도 그곳의 부동산 가격이 바로 나오는 세상이다. 타고 다니는 차의 브랜드만 봐도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판별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얼마 후 나는 일 년 치 전셋값 상승분만큼의 그 차 수리 견적을 보험회사로부터 받았다. 다행인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내차는 수리하지도 않았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자동차 보험사를 바꾸었다.

접촉사고 후 좋은 차를 타고 바로 도착했던 그의 보험사와는 달리, 이상한 레커차를 타고 늦게 와서 허둥지둥했던 그 ‘없어 보이던’ 보험담당자가 꼭 내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상대 차의 보험사로 조금 더 사치스럽게 바꾼 것이 나만의 화풀이였던 것이다.

이후 나는 두 번 차를 바꿨다. 

한 번은 새 차로, 다른 한 번은 중고차로.

그 사이 두 번의 이사를 하며, 어찌어찌 집을 마련했다.
휴직한 아내와 2년마다 껑충 뛰는 전셋값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부모 도움 없이 결혼 준비도 하고 신혼집도 구한 그 알량한 분이, 부모 도움으로 인생 편하게 사는 이들을 따라 했다. 요즘은 누구나 다 쓴다는 부모 찬스에 추가로 은행대출 찬스도 쓰게 됐다.

쪽팔려도 부끄러워도, 당장은 좀 빌려 쓴다는 심정으로 그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렵게 들어간, 괜찮다던 첫째 아이의 유치원에서는 집주소가 그러그러해서 아이가 ‘은따’를 당하는 걸 어머니가 잠깐 올라와서 보시고 우셨다고 했다. 둘째 출산 후 아내의 산후조리 기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런 어머니가 나서서 어찌어찌 집을 갖게 된 것이었다. 


서울 한 구석에서 제대로 된 정신으로 살기란 정말 답이 없는 일이다.

오래전 입으로 죄를 짓던 그와 그의 딸도 서울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하며

심리상담센터 이곳저곳을 검색해본다.


나는 여전히 그 매가리 없는 야구팀을 응원한다. 이유도, 상식도 없는 의리로.

그 팀은 그 이후에 진짜 가을 야구를 한번 했는데, 그때도 진짜 매가리가 없었다.


차를 두 번이나 바꾸었지만 그 사고의 이력으로 나는 아직 꽤 비싼 보험료를 내고 있다.


그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어느새 그때의 형보다 더 자라있다.

두 아이의 아빠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벽'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높지 않은 아빠의 벽을 보며, 일상에서 은연중에 그것들을 보고, 들으며, 자라고 있다. 

이곳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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