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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Aug 26. 2020

자취방이 경매에 넘겨졌다

아주 비싼 인생 수업료

살고 있던 자취방이 경매에 넘겨졌다.


첫 번째 직장을 퇴사하고 이직했던 직장 근처로 이사하려고 집을 알아보고 먼저 가계약을 했다.

그런데 살던 집에 와보니 법원에서 경매절차를 진행하겠다는 이상한 등기가 도착해 있는 것이었다. 

4층에 살고 있는 주인세대에 올라가 보니 벌써 며칠 전에 이사를 가버려 빈집이었다.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각 층마다 3~4세대 정도가 살고 있고, 맨 위층인 4층에는 주인집이 살고 있는 강남의 다세대 빌라 건물이었다.

일단 가계약을 해놓은 새로 이사할 집은 부동산에 사정사정하여 중개수수료를 두 배로 무는 조건으로 겨우 계약을 취소하였다.

약 10세대의 세입자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게 되었다.

상황을 파악해보니, 집주인은 이 건물 말고도 강남 땅덩어리에 다세대 주택을 여러 채 보유하고 있었고, 당시의 참여정부의 부동산 규제 정책의 영향으로 이 건물의 전기세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체납이 되자, 한국전력에서 주채권자인 은행과 함께 경매개시를 진행하게 된 것이었다. 


대학시절 수강했던 생활법률이라는 교양과목에서 들었던 수업내용 중 교수님이 중요하다고 하셨던, 부동산 등기부등본의 을구가 실생활에서 이렇게 중요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생활법률 과목의 성적은 A를 받았으나, 실제 생활법률의 적용 성적은 F 였던 것이다. 


경매에 넘어간 그 집을 얻게 된 건, 신입사원 연수 후에 갑자기 서울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해당 다세대 건물에 은행의 채무가 9억 정도가 있었지만, 이 건물의 시장가치가 그 몇 배라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그 채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건물주가 강남에서 이런 건물이 몇 채가 있는 부동산 재벌이라는 말에 의심 없이 계약을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건물주라는 사람들이 소위 ‘바지사장’인 경우가 많았다. 은행 빚을 지고, 세입자들의 돈을 받아서 건물을 짓기만 하면 그 건물은 돈 얼마 안 들이고 본인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조금 더 생기면, 은행에서 대출을 더 받고 다른 다세대 건물을 지어 세입자의 돈으로 다시 건물주가 되는 빈껍데기 주인인 것이다. 

이 건물의 주인이란 작자도 그랬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강남의 집부자이지만, 실제로 당시 정부의 부동산 다주택 규제가 생기자, 건물의 전기세도 못 내어 다른 건물과 함께 줄도산이 당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나와 같이 전세금을 넣고 들어갔다가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경매절차로 들어가게 된 사람들이었다.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갑자기 서울로 부서 배치를 받게 되면서, 부모님이 어렵게 마련해주였었던 그 자취방의 전세보증금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계약 당시 집주인을 강남의 부동산 부자라고 소개하며, 계약을 종용했던 부동산을 찾아가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했으나, 본인들은 중개만 할 뿐 아무 책임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통하던 시절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그 부동산을 통해서 집주인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세입자들과 함께 찾아갔다.


집주인은 본인 명의의 이 건물 저 건물의 대출을 땡겨서, 잠원동에 커다란 찜질방을 공사하고 있었는데, 이것 마저도 자금이 융통되지 않아 공사가 중단된 상황이라며 하소연을 했다. 

오히려 찾아가는 세입자들마다 돈이 생기면 당신 돈 먼저 쥐어주겠다며, 거짓말까지 뻔뻔하게 해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환멸을 느꼈던 것 같다. 


여러 층의 세입자들과 발을 동동 구르고, 법적인 도움을 여러 곳에 요청하였으나

등기부등본의 제1채권자인 은행의 권리보다 세입자의 권리가 우선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세입자 중에는 그 흔한 부동산 확정일자도 받아놓지 않아서 세입자의 권리도 행사할 수 없는 세대도 있기도 했다.

경매 절차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되기까지 약 2년간의 시간이 흘렀다.

인생에서 가장 긴 2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답답한 가슴으로 어떻게 버텨왔는지도 모를 시간이었다. 

하소연도 여기저기에 하고, 술도 먹고 눈물도 흘려보던 세월이었다.

대학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공부를 하던 전공자였지만, 실제로 사회적 약자가 되어보니, 스스로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서러운지 아주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경매가 마무리될 때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각 세대의 경매 낙찰자라는 사람들의 무리가 찾아와 벌써부터 집주인 행세를 하는 꼴도 여려 차례 겪었다.

한 번은 건축물대장과 실제 등기부등본의 호수가 다르다며, 이런 상태로는 대항력이 없어 돈을 받지 못한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는 수없이 같은 층의 모든 세입자들이 하루 동안 모든 짐을 다 내어 집을 바꾸는 일도 있었다.

깔끔하고 환기가 잘되는 내 집의 방이, 누군가의 작업실로 쓰던 방으로 바뀌게 되면서 곰팡이 냄새를 맡으며, 끝없이 나오는 머리카락과 쓰레기를 치우던 기억은 아직까지 좋지 않게 남아있다. 

그 큼큼한 냄새가 나는 집에서 밤마다 가위에 눌리며, 경매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사귀던 여자 친구와도 이별도 하고, 지금 아내가 된 여자 친구도 만나게 되었으니 땅이 꺼지는 지옥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싶다. 


내가 살던 자취방을 낙찰받았던, 나와 동갑내기인 어느 연구원이라는 사람은 일찍부터 경매를 공부하여 강남의 한 건물의 방 한 칸의 주인이 되었다. 낙찰자들 사이에 나와 그의 이야기는 한동안 회자되었다. 동갑내기 중 한 명은 부동산 등기부등본에 눈이 어두워 전세금을 잃게 생겼고, 다른 한 명은 일찍부터 재테크에 눈을 떠서 그 집을 낙찰받았다는 조롱 섞인 이야기가 짜증 났다.

그래서 였는지 모른다.

내가 이사하던 날, 이사비를 조금이라도 주지 않으면 이사하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우겨가며 그에게 받았던 10만원은 내 상황에 대한 화풀이였던 것이다. 


배당 재판이 있던 날, 나는 기존 전세금 5천만원중 4천2백만원 정도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는 제1채권자인 은행이 가져갔다. 결론적으로 나는 집주인에게 8백만원을 떼이게 된 것이다. 


못 받은 8백만원을 받아내기 위해서, 그간 고생했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 나는 추가 소송을 진행했고, 그 건물 세입자들과 집주인이 있는 찜질방 건물에 찾아가 시위하기도 했다. 

휴가를 내고 가기도 하고, 술을 먹고 가서 집주인에게 마음속의 나쁜 말들을 게워내기도 했다. 

집주인을 찾아갈 때마다, 다른 건물에서 돈을 받지 못한 다른 세입자들과 마주쳐야 했으니 내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께서 내가 돈을 받으러 휴가를 내어 다닌다는 말씀을 듣고, 해주신 말씀을 듣고 더 이상 그것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시세보다는 싼 보증금으로 경매가 진행되는 기간까지 오래 살았으니, 월세 내었다고 생각하고 그만두어라.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데 겨우 그 돈에 목을 매어 시간을 낭비하지 말거라”


그 말씀에 머리 한쪽을 한 대 맞은 거 같았다.

정말 그랬다. 내 돈을 찾겠다고 그 찜질방 건물에 다녀온 날이면 오히려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내 입이 더러워졌고, 기운에 얹어서 화를 필요 이상 내야 했다.

내 인생이 그냥 못 받은 돈, 팔백만원짜리 인생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 돈을 그냥 내 인생에서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모든 집의 문제를 마무리 짓고, 다니던 직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집 걱정 없이 살기 시작한다는 게 이렇게 홀가분하고 좋은지 새삼 깨달았다.

경매 딱지 붙은 작은 자취방을 들어갈 때마다 깊게 내쉬던 한 숨도 내뱉을 이유가 이제 없었다.

바닥의 바퀴벌레와 마주할 일도 큼큼한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어 가위에 눌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사한 집에서 휴일에 돌아가는 드럼 세탁기 안의 빨래를 보고 있는 일상이 마냥 즐거워 몇십 분씩 그 앞에 앉아서 보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그렇게 서울살이에서 조용한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전세 기간은 2년으로 계약했는데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8백만원 짜리 보다 더 값진 인생을 살기 위해 새로 시작했으나 6개월도 안돼서 다시 지방에 집을 구해야 하는 짜증 나는 상황이 펼쳐졌다.

‘인생 참 마음대로 안되네’


그렇게 지방에서 몇 년을 살다가, 다시 결혼을 위해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집은 더이상 사는 곳이 아닌 사는 것이 되어버린 이후에, 살기 위해 나는 다시 서울살이를 하게 되면서 집 문제로 다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정도 사건을 겪었으면, 다시는 집 때문에 골머리를 썩을 일이 없겠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고, 겸손해야 할 대상은 맞는 거 같다. 


아직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고, 등골을 빼먹고 사는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 

자신의 인생과 남에게 절대 겸손하지 않은 그들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 믿는다.


나도, 내 아이도, 내 주변의 이들도

그런 일을 다시는 겪지 않아야겠지만, 그런 일을 혹시라도 접하더라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이 글로 나를 다독여 본다. 


사진출처1   https://weekly.donga.com/3/search/11/9960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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