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운명적 상대와의 사랑을 믿으시나요? 아마 많은 분은 아주 어릴 적에는 믿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믿지 않게 되는 것 같다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저 역시도 그러했는데요. 이번에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감상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그 내용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우선 영화를 이해하려면 제목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겠죠. 영화의 제목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열쇳말이니까요. 그러면 영화에서 ‘뉴욕’은 어떻게 의미화가 되고 있을까요? 개츠비의 대사를 통해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개츠비는 뉴욕이라는 자신이 살던 동네를 이렇게 설명하죠.
‘뉴욕에 한 번 빠지면 다른 곳은 성에 차지 않게 된다. 이 정도의 불안감, 적대감, 불신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멋진가?’
이 말에 따르자면 뉴욕은 높은 수준의 불안감, 적대감, 불신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죠. 그렇다면 높은 수준의 불안감, 적대감, 불신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이 대사가 나온 후, 개츠비는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개츠비는 그 동창을 ‘고등학교 동창 중 가장 기분 나쁘고 역겨운 자식’이라고 소개해요. 그는 개츠비가 설명한 것과 같이 정말 기분이 나쁘게 모든 세상만사를 논평합니다. 만나자마자 묻지도 않은 남들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남의 외모나 남의 성격에 대하여 쉽게쉽게 평가절하합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근황에 관해 물어봐달라고 직접 말합니다. 그리고서는 재수 없게 ‘나 겨우 세인트 조지에서 의예과나 다니고 있어’라며 으스대고서는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는 항상 불안감과 적대감, 불신이 모여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떠한 의미도 추구하지 않고 살아가면 사람이 속물적으로 변해버립니다. 불안감, 적대감, 그리고 불신이 모여있는 곳에서 어떠한 의미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과 교류하려면 나를 지킬 수 있는 지위나 재력에 의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고 나면 속물들은 남들을 쉽게쉽게 평가 내려버립니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묘사하고 싶은 뉴욕은 과연 속물들의 도시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불안감과 적대감, 그리고 불신이 어떠한 의미인지 알아야겠죠. 어떠한 의미를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불안감, 적대감, 그리고 불신을 최대한도로 잘 활용해야 하는 작업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아주 많이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그런 작업을 주로 하게 되죠.
자, 이 영화에서 뉴욕이 어떻게 의미화되는지를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는 비 오는 뉴욕은 어떤 의미일까요? 영화에서 비는 언제 내리기 시작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키스씬! 개츠비는 우연히 들르게 된 고교 동창의 영화 촬영 현장에서 엑스트라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런데 맡게 된 엑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은 무려 키스씬입니다. 그것도 키스하게 되는 상대 배우는 옛 연인의 여동생인 챈입니다. 개츠비는 키스하려고 하자, 여자친구인 애슐리가 생각이 나서 키스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챈은 개츠비를 갈구죠. 그러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챈과 개츠비는 뜨겁게 키스를 나눕니다. 비가 오기 시작하자 주인공인 개츠비는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비가 오는 날의 뉴욕’은 낭만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자친구를 놔두고서 딴 여자와 키스를 하는데, 무슨 낭만이냐고요? 약간의 바람기는 낭만으로 허용된다, 뭐 이런거냐고요? 절대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개츠비의 운명적 상대로 나오는 사람은 여자친구로 나오는 애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개츠비의 운명적 상대는 비가 오자 뜨거운 키스를 나누기 시작하는 챈입니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애슐리와 개츠비의 관계는 낭만적인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낭만적인 사랑이 아닌데 왜 둘이 데이트를 하고 연애를 하는 관계로 나올까요?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핵심적인 포인트랍니다. 우리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낭만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애슐리와 개츠비의 관계를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둘이 함께 대화하는 장면은 정말로 이상한 방식의 소통입니다. 애슐리는 개츠비에게 가서 대학교 신문사에서 롤런 폴러드 감독의 인터뷰를 자신에게 맡겼다고 자랑합니다. 그러자 개츠비는 그것을 듣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어떻게 그 인터뷰를 맡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언제 하는지, 어디에서 하는지 상세히 묻죠. 그러다가 자신의 고향인 뉴욕 맨해튼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자 정말로 즐거워합니다. 드디어 우리가 맨해튼으로 가는 특별한 주말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개츠비는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그 주말에 갈 데이트 코스를 짭니다. 자신이 예전에 말했던 추억의 장소들을 다시금 되새기며 그곳으로 가자고 말입니다. ‘칼라일 호텔 예약해야겠다. 거기 바에 대해서 얘기했었지. 피아노 연주에 뮤지컬 곡들을 불러주는 바 말이야. 그 전에 점심이랑 저녁은 호텔 밖 시내에 나가서 먹는 거야!’, ‘그런데 칼라일 호텔에서 묵으면 안 되겠다. 집이랑 너무 가까워. 난 그래도 네가 센트럴파크가 보이는 곳에서 같이 하룻밤을 보냈으면 해. 그러면…… 피에르에 묵으면 되겠다! 그러면 공원도 보이고 부모님 집과도 거리가 있고. 칼라일 호텔 바는 저녁 먹고 가서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아! 피에르는 진짜 옛날의 뉴욕이라서 내가 정말 좋아해! 베멀먼즈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그러자 애슐리는 즐거워하며 말합니다. ‘나 네가 맨해튼 구경시켜주기를 언제나 원해 왔었어!’
그러나 애슐리가 관심 있는 맨해튼은 자신의 연인 개츠비의 고향인 맨해튼이 아닙니다. 애슐리가 관심 있는 건 그저 자신이 사는 미국의 중심, 뉴욕 맨해튼입니다. 애슐리는 개츠비가 언급하는 장소들에 대하여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그곳이 개츠비에게는 어떤 의미의 공간인지, 왜 그곳을 좋아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애매한 감탄사만 연발하며 넘길 뿐이죠. 그리고서는 자신이 미국의 중심지인 맨해튼을 관광해본 아주 단편적인 경험만을 말할 뿐이죠.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츠비와 애슐리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언제나 개츠비가 애슐리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그런 종류의 연애입니다.
그렇다면 애슐리는 개츠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애슐리가 개츠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애슐리의 대사를 통해서 직접 확인됩니다. 영화 각본가 테드 다비도프와 자신의 남자친구에 관해 대화할 때 나오는 대사입니다. ‘그 애는 전문적인 직업 쪽에 관심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그 친구는 자기가 뮤지컬에 나오는 도박꾼과 같이 되는 것을 꿈꾸는 것 같아요. 약간 괴짜인 친구에요. 엄마와 사이가 안 좋아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많은 걸 읽게 하고 피아노를 배우게 했거든요. 정말 똑똑하긴 해요. 공부를 안 하다가 시험에서 1등 해버리는 타입의 아이예요. 솔직히 말하면 비밀인데…… 그애가 아스퍼거 증후군 끼가 살짝 있는 것 같아요.’
아스퍼거 증후군… 자폐스펙트럼 장애 중 하나로 지적 능력이 양호하지만,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이 떨어지는 증상을 의미합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특정한 주제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지면서, 그 주제에 대해 듣는 이의 느낌이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러나 엄밀하게 둘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둘의 관계에서 듣는 사람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만 계속 말하는 쪽은 애슐리입니다. 그리고 연애라는 관계의 특성상, 이건 애슐리가 특정한 종류의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라기보다는 개츠비라는 사람 자체에 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연애라는 게 그런 때도 많습니다. 그 사람 자체에 관해서 관심이 없는데, 그냥 외로워서 만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죠. 아니면 그 사람에 관심 있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풍기는 느낌이 좋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예 그 사람의 조건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애를 하지만 서로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죠.
그렇다면 애슐리는 왜 개츠비와 연애를 하는 것일까요? 애슐리의 행동 패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애슐리는 예술가가 풍기는 느낌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영화감독 롤런 폴러드에게 급격하게 내적 친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영화 각본가인 테드 다비도프와 대화를 하면서 성적 흥분을 느낄 때 한다고 밝힌 딸국질을 합니다. 그리고 영화배우인 프란시스코 베가와는 하룻밤 잠자리 상대로 만나보고자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애슐리가 예술에 진정으로 조예가 깊다거나 예술에 관해 깊이 탐구하면서, 예술의 의미를 찾고 즐기고자 하는 타입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예술이 주는 느낌만을 좋아할 뿐입니다. 극작가 데니가 애슐리에게 가장 좋아하는 폴러드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 질문하자 애슐리는 「윈터 메모리즈」라고 답합니다. 그러면서 「윈터 메모리즈」를 처음 본 경험에 대하여 말하죠. 개츠비와 했던 첫 데이트였는데, 그 영화의 대사가 자신을 자극했다고 말입니다. ‘대사 때문에 키스하고 싶어졌어요. 사랑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대사요.’
그러나 그 대사를 이해했냐는 질문을 받자, 대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냥 혼란스럽고 불안해져서 개츠비가 날 안고 키스해줬으면 했어요.’ 이와 같이 애슐리는 예술에 정말로 조예가 깊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본 예술 작품의 의미를 탐구하고 싶다거나 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예술이 주는 느낌을 좋아하며, 예술가 느낌을 주는 남자들에게 끌릴 뿐입니다. 일종의 동경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학교에서 가장 예술가 느낌을 풍기는 개츠비를 만나 연애를 하지만, 사실 그가 끌리는 것은 그 느낌일 뿐입니다. 개츠비라는 사람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죠. 개츠비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으며, 개츠비의 말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개츠비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을 말하면 ‘쟤는 왜 저런 말을 하지...’ 생각하며 다시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 관해 말하겠죠.
그렇다면 개츠비는 애슐리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것도 대사로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챈이 애슐리에 관해서 묻자 개츠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상큼 그 자체라고, 매력 있지, 사랑스럽지, 예쁘지, 가끔씩은 섹시하기도 하고, 또 걔는 재치도 있어! 노래도 잘하고, 플루트도 연주 잘해!’ 이런 것을 표현하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이상화’. 왜 ‘콩깍지’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냐고요? 저는 ‘콩깍지’랑 ‘이상화’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콩깍지’는 그 사람의 결점을 인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결점까지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다르게 ‘이상화’는 그 사람이 이상적인 상대처럼 보이며, 결점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저의 친구가 콩깍지가 씌었을 때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에휴, 너는 그런 부분이 어떻게 사랑스럽게 보이냐?’ 그런데 친구가 연애 상대를 이상화하고 있다면 개츠비의 말을 들은 챈의 대사를 그대로 말해줄 것 같습니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더 이상은 못들어주겠다!’
그렇다면 개츠비는 왜 애슐리를 이상화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그런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너무 비슷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너무 다른 사람일까요? 이상화는 보통 이 두 가지 경우에 이루어지겠죠. 먼저, 너무 비슷하다면 애슐리가 개츠비를 아스퍼거 증후군인 것 같다는 말까지 하진 않았겠죠. 그렇다면 개츠비와 애슐리는 지나치게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개츠비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두고 이상화하고 있는 것일까요? 영화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개츠비는 영화감독의 인터뷰를 맡게 된 애슐리와 주말 데이트를 할 생각으로 뉴욕 맨해튼에 함께 갑니다. 그러나 애슐리는 인터뷰하다가 인터뷰 대상들이 하는 이런저런 제안들에 이끌리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감독이 신작 영화를 한 번 보고 확인하는 자리에 함께 가려고 하냐는 제안, 극작가가 감독에게 영화를 칭찬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주려냐는 제안, 아니면 우연히 마주한 영화배우가 애슐리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는 제안 등에 그저 이끌리며 한참 시간을 보냅니다. 이렇게 제안들에 이끌리게 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애슐리가 예술가를 동경하고 예술가에게 끌리는 사람이라서겠죠.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애슐리가 높은 수준의 욕망을 세련되게 다루는 뉴욕 사람들의 방식을 처음 경험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애슐리는 남자들의 관심을 끌 만큼 정말 예뻤기에 애슐리가 남성이라면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제안들에 애슐리는 휘말립니다. 그리고 호의적인 형태의 제안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러한 제안들의 본질은 그저 예쁜 애슐리를 옆에 두고 싶은 남자들의 욕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죠. 그러나 애슐리는 뉴욕 사람들과 같이 욕망을 다루는 사람들은 정말 처음인 중서부 사막 도시, 애리조나 투손 출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욕망 섞인 제안에 대하여 ‘불안감, 적대감, 불신’을 가지고 상대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남자 예술가들이 던지는 호의적인 제안 형태를 띤 욕망에 계속 휘말리죠.
개츠비의 여자친구가 남자 예술가들의 욕망에 의해 이리저리 이끌리는 동안 개츠비는 절망스러워하다가, 옛 여자친구의 동생인 챈을 만납니다. 챈과 개츠비는 ‘불안감, 적대감, 불신’에 가득한 듯이 서로의 행동을 비꼬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친근감과 호감을 표시하죠. 그렇게 챈과의 나들이를 마치고도 개츠비는 여자친구와 연락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호텔 방에서 틀게 된 TV를 틀자 애슐리와 영화배우 프란시스코 베가의 저녁 데이트에 관한 보도가 흘러나오죠.
그래서 개츠비는 우연히 만난 매춘부를 여자친구 애슐리라고 속이고 자신의 집에서 여는 파티에 방문합니다. 하지만 개츠비의 어머니는 이를 알아차리고 매춘부를 집에서 내보낸 후에 개츠비와 대화합니다. 왜 이렇게 속을 썩이냐고 묻자, 개츠비는 온갖 고급적인 문화 취향을 가진 가족인 것처럼 보이려고 사람을 옥죄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개츠비의 어머니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중서부에서 와서 생계가 어려운 때에 매춘부 일을 했었다고. 그래서 어떻게든 그런 과거와 먼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고급문화 취향을 가진 가족이 되려고 했는데, 그런 이유로 너를 힘들게 했으면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이 대화는 개츠비의 내면에 심대한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어머니와의 불화는 개츠비의 성격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도입에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어머니와의 갈등이 거의 여과 없이 드러날 정도이죠. ‘이곳은 야들리다. 리버럴 아트 스쿨로 유명하고 전원풍의 아름다운 교정이 엄마의 고급 취향에도 딱 맞았지만 빚좋은 개살구다. 풀밭에는 진드기가 가득하다. 야들리는 내가 몇 달 다닌 저번 대학보다 훨씬 체계적이다. 내가 적당한 교양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엄마가 보냈던 말만 아이비리그인 사이비 지성의 전당. 엄마는 내가 지능은 높은데 제대로 나의 잠재력을 사용하질 않는다나. 지난 주말에도 포커로 2만 달러나 땄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 대화 이후 자기 어머니의 결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불화로 인하여 무의식적으로 멀어지고 싶어 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스스로 용인할 수 있게 되죠. 이러한 무의식적 기제는 주양육자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복잡한 정신 역동의 과정이 숨어 있기에 단순한 인과율을 통해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건, 개츠비는 자기 자신과도 화해를 할 수 있게 되었죠.
다음날, 개츠비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학교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애슐리와 대화를 하다가 또다시 대화가 겉돌게 되자 애슐리에게 우리는 서로 다른 종인 것 같은데, 왜 만나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애슐리에게 학교로 돌아가라고, 자신은 뉴욕에 남아서 인생을 망칠 방법에 대해서 궁리해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여자친구의 순진무구한 듯한 모습이 이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죠. 어머니의 결함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자, 자신의 개성인 내면의 ‘불안감, 적대감, 불신’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감, 적대감, 불신과는 거리가 먼 애슐리가 더는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과 같이 ‘불안감, 적대감, 불신’을 가지고서도 그것에 대해 낭만적인 의미화하는 것을 추구하는 챈입니다. 챈이 궁금해하고 끌리는 것은 그저 개츠비라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에 개츠비가 챈과 대화할 때는, 애슐리와 있을 때와는 달리, 대화가 겉돌지 않습니다. 챈은 개츠비가 미래에 어떤 것을 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뭐가 되고 싶은지는 모르겠고 되기 싫은 것만 알 것 같아서 허우적대는 중이라는 개츠비의 대답을 듣고서는, 아직 전략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만 단순화하며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개츠비가 하기 싫은 것들의 예시, 비행기 조종사나 성직자, 의사 등을 듣고서는 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어줍니다. 그저 틀에 맞추는 걸 싫어할 뿐이라고, 그러면서 그것이 매력이어서 옛날에 첸이 개츠비를 짝사랑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개츠비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닐 때 데이트에 관해서 들으며 세부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듣는 것이 좋아 이것저것 언니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밝힙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위로를 받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이란 감정에 속고, 사랑이란 감정에 실패감을 느끼기도 많이 해봤죠. 그래서 그건 없는 거라고, 별거 아닌 거라고 믿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참 신기하게도 인생 자체가 무의미한 거라고 느껴진 것 같아요. 세상은 아무 의미 없고, 인생도 그냥 아무 의미 없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쿨병에 걸린 듯이 운명적인 만남이나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으며 조소하는 듯한 태도에 대해서 사뭇 비판적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려다가 괜히 이건 아닌 것 같으니, 상대의 아주 사소한 웃음 소리 같은 것을 결함으로 삼아 결혼을 주저하는 개츠비의 형에 대해서 사뭇 비판적입니다. 반면에 이 영화에서 긍정하는 대상은 상대의 결함을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에서조차도 매력적인 포인트를 찾는 챈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챈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지만, 운명적 상대를 만나기만 하면 한 번으로도 충분해.’
아마 이 대사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운명적인 상대와의 만남에서 풍기는 달달한 로맨스를 아주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죠. 챈은 개츠비와 옛날 영화에 대해서 말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빗속에서 연인들이 키스하면 안 돼? 아무리 상업적이라고 할지라도 나에게는 좋게만 느껴지는걸.’ 상대의 결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낭만을 추구하는 챈은 마지막에 결국 개츠비를 택합니다. 아니, 사실 챈에게는 처음부터 개츠비뿐이었죠. 자신이 생각하는 운명적 상대와 자신이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저 대체할 만한 데이트 상대를 찾았을 뿐입니다. 그러자 자신의 앞에 개츠비가 나타나고, 그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이자, 둘이 지나가듯이 설정한 운명적 상대와의 만남 장소에 그 시간에 갑니다. 아주 잘 생기고, 아주 똑똑하고, 돈까지도 많은 피부과 의사를 버리고 말입니다. 자신이 운명적 상대라고 생각하는 개츠비가 아무리 남들이 보기에 그저 한량이라고 생각될지라도 챈은 개츠비를 선택하죠.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인구의 많은 비중이 100만 이상의 대도시, 아니면 대도시의 위성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 많은 욕망들과 마주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속물이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의미나 낭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쿨하지 못한 것, 아니면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세계에서 살게 되면, 아주 객관적인 양적 지표로 설명될 수 있는 것만이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양적 세계관 앞에서는 모든 게 평등하게 숫자로만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호르몬의 장난일 뿐이며, 한량처럼 자신만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과 상대하는 것은 그저 시간 낭비라고 받아들이죠.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만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해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가도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의미의 세계에서 나의 결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상대의 결함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낼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맺어보라고 권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메시지가 여러분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을까요? 저에게는 아주 약간의 위안은 되어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