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장의 정성이 담긴 편지!
수지야! 수지는 정말 대견한 나의 사랑스러운 손녀구나. 한 장의 편지도 어린 나이에는 쓰기 어려운 것을 자그마치 매일매일 9장이나 서서 보낸다는 것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나의 귀여운 수지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수지는 대단한 어린이다. 할아버지는 그 편지 한 장 한 장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단다. 우리 수지는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틀림없이 될 거라고. 수지야! 할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 고맙다.
수지가 회장, 부회장 선거에서 비록 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수지의 착한 마음씨와 정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하나도 걱정하지 말아라. 그 대신 국어 모임에 조장을 맡아하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열심히 일을 해라.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집에 오면 6시가 되니 얼마나 힘이 들겠니. 공부도 하는 틈틈이 쉬기도 해야지.
수지야! 엄마 아빠 말씀은 잘 듣고, 동생도 잘 돌봐주면서 지내야 한다. 또 학교에서 많은 친구들도 사귀고 사이좋게 지내라. 너무 무리하면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단다. 쉬어가며 공부하는 거야. 착하고, 귀엽고, 씩씩한 수지야, 할아버지가 수지를 지원하니 학교에 잘 다니고, 공부도 잘하고
그럼 수지야, 안녕~
2001.4.2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수지에게
지난날 답장이 밀린 채 주기적으로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으면서, 사실 답장은 썼지만 부치기가 귀찮았다. 지난 글에서 그럼에도 계속해서 보내준 편지에서 할아버지의 애정을 느낀 이야기를 적어본 바있다. 그 뒤로 모아둔 편지를 한꺼번에 동봉하여 부쳤고, 할아버지는 이를 받아보고 크게 기뻐하셨다. 세게 누르면 찢어질 듯 아주 얇은 종이 너머 그의 마음이 다 느껴지는 듯했다. 무뚝뚝하고 점잖으신 분이셨지만, 편지에서는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고 계셨다. 별것 아닌, 사실 답장이 밀린 것을 모아 부친 것임에도 그리 좋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누군가를 향해 움직일 때 양심이 가동되는 경우가 많다. 그에게 방향을 돌리는 이유는 대게 ‘그가 좋아서’와 같은 대목보다는 ‘그가 -할까 봐’와 같은 대목이 훨씬 많았다. 한 번은 도덕 시간에서 선생님이 ‘바른 친구’에 대해 추천하고 그 이유를 대보자고 한 적이 있는데, 친구들이 나를 추천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신발을 실수로 밟으면 털어주거나, 짐이 많으면 들어주거나 하는 나의 가식과 같은 행동들은 주로 좋아서 가동되기보다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가동이 된 적이 많다. 만약 사람 마음에 행동을 가동하는 버튼이 있다면, 나는 그걸 게임 스틱처럼 쥐고 다녔다. 그리고 그 버튼을 누르는 건 타인으로 하여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지레 겁을 먹고 였던 적이 많았다. 그런 나의 행동만을 보고 친구들은 날 ‘바른 친구’로 추천했는데, 당시에는 기분이 좋았으나 지금은 너무나도 부끄럽다. 그들은 나를 정말 친절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으니,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이다. 편지에 적혀있듯 당시 나는 반장선거에 나갔었는데, 반장도 부반장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큰 좌절이었다. 그리 가식 어린 행동으로 무장했으나, 돌아오는 게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 푸념 어린 손녀에게 그것은 하나도 걱정할 일이 아니라 단언하는 그의 글에서 나는 든든함을 느꼈다. 9장의 답장을 써서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9장의 편지를 써서, 그렇게 정성을 보여주어서 내가 대단하다고 추켜올리는 것에는 나를 그냥 믿어주는 대들보 같은 믿음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편지엔 유려한 글솜씨도 없고, 나를 칭찬해주는 대목도 늘 반복되며, 공부와 건강에 대해 신신당부하는 모습이 있다. 그리고 다음 편지에서도 이는 비슷하다. 그래서 이렇다 할만한 이야기가 없는 투박한 편지지만, 반복되는 낱말들 속에서도 그의 애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 의아한 마음까지 들었다. 나는 식물러다. 화분을 좋아하여 매일 들여다보고, 흙의 수분을 체크하며 물을 흙이 젖어들 만큼 주기도 하고, 분무로 잎을 적셔주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패턴과 같이 늘 반복된다. 할아버지의 글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느꼈다. 나를 칭찬하는 그 글이 유려하고 감동적이어서 좋은 게 아니라, 덧없이 반복해주어 좋았던 것 같다. 모난 말 없이, 이유없이 어찌보면 답답하게도 반복해주는 하루하루 속에서 자라왔다. 돌아보면 반복은 단언컨대 놀라운 학습을 발휘시킨다. 우린 반복하면서 학습하고, 행동으로 발현하고, 이를 통해 가치를 깨달아간다. 가족 안에서 자란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는 자리가 있다면, 난 그렇게 자라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은 사람이라고 설명하겠다. 그런 반복된 손길속에서 자라 틔우고 맺어왔던 삶이라 소개하겠다.
덧 없이 반복하는 손(2022.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