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롱은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녀원에서 착취당하는 소녀를 만난 후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떠한 선택'을 억누르고 회피하기 위해 애쓴다. 펄롱은 여전히 일상을 살고, 타인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음속 희미한 불편감은 사라지지 않고 점차 커지기만 한다. 펄롱은 결국, '어떠한 선택'을 수행함으로써 이 희미한 불편감을 희망에 대한 확신으로 바꾸게 되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펄롱이 수행한 '그 어떠한 선택'이라 함은 '소녀를 구하는 것'이었다.
펄롱이 할 수 있었던 '그 어떠한 선택'들은 수천 수백만 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책에서처럼 소녀를 구할 수도 있었고, 소녀를 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혹은 수녀원에 그런 소녀들이 있음을 사회에 고발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마음이 불편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버리는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사소한 선택들을 헤아리다 보면 최근 각광받는 판타지 소재 중 하나인 '멀티버스'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펄롱이 자신의 불편감을 해소할 수 있었던 선택들은 수천만 개의 멀티버스로 갈라졌을지언정 키건의 책에서는 펄롱의 단 한 가지 선택만이 우리에게 제시된다는 점을 주목해 본다. 이 선택이 불러올 미래와 나비효과는 책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선택이 그에게 행복한 미래를 가져다줄지도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펄롱의 삶과 감정선을 따라가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양심적 선택을 함께 했다. 그 선택은 아주 사소하지만, 다정하고, 당시적이다.
문득 서로를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119)
펄롱이 그랬듯이 우리에게는 살다 보면 가끔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주어진다. 그때 인간은 그 누구도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음에도, 모험적인 선택을 하곤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모험이고 인생에 다시없을 중요한 선택일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멀티버스 속에서 지금 이 삶을 영위하는 내가 하는 선택만이 내가 사는 일생이 된다. 과거는 나의 모든 선택의 기준이고, 현재는 나의 모든 선택의 순간이며, 미래는 나의 모든 선택의 결과가 된다. 결국 인생이란 아주 사소하지만 아주 밀도 있게 들어찬 선택의 나열에 불과할지 모른다. 아마도 '일생일대의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지도 모른다. 일생일대라는 단어가 가진 힘이 이토록 나약하다면, 나는 내 모든 일생의 선택에서 가장 다정한 편에 마음을 보태고 싶다.
이 책의 작가 클레어 키건은 책을 쓸 때 '쓰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에 더 집중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독자들 역시 이 작가의 책을 읽을 때, 억지로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해석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단지 마음속 울림이 주는 깊은 다정함을 공감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