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에 읽다가 포기했던 책을 다시 읽었다. 굉장히 철학적인 작품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약 100번 시도했다 101번 실패한 나로서는 이 책도 큰 도전이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재밌게 읽었는데, 데미안은 영 읽히지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 5년 동안 불교 관련 도서를 종종 접하기도 했고, 고전 문학을 몇 개 더 읽어봐서 그런지 이번에는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사문의 길을 걷는다. 그러다 석가모니를 만나 자신이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결정하지만, 곧이어 카말라와 카마스와미를 만나 부유한 상인이 되어 초심을 잃은 채 살기도 한다. 그러다 강가의 뱃사공 바주데바와 함께 살게 되며 그와 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바주데바를 떠나보내면서 시간이라는 것에 구속받지 않는, 즉 '나'라는 자아가 모든 곳에 있고 또 모든 곳에 없음을 통달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싯다르타와 궤를 같이하고자 했으나 나는 고빈다에밖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컸다. 사실 고빈다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 역시 배움과 가르침을 통한 일방적인 구도를 원하고 있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 깨달음이 얻을 것이고 내면의 평화가 생길 것이고... 그런 것들을 쉽사리 얻고자 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구도를 기다리지 않았다. 찾아 떠났다. 천편일률적인 일방통행적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을 얻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말만 들으면 아주 얌전한 사람일 것 같지만 싯다르타는 계속 도전한다. 선정(禪定)을 위하여 가족을 떠나고, 사문을 떠나고, 사랑하는 여인과 부를 떠난다. 정해진 틀을 벗어나 스스로 고행에 나서고 자신이 이해되지 않은 부분을 감히 고타마에게 따져 묻기도 할 만큼 직각적인 행동력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의 행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단일성의 추구'이다. 이 책에서 단일성은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데,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강을 통해 자신이 찾아 헤매던 깨달음이 단일성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삼라만상을 이해하게 된다. 나와 너,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선과 악, 이외에도 그 모든 양면들은 하나의 것으로 통합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 결국 내가 곧 세상의 전부일 수도, 악독한 범죄자일수도, 선지자일 수도, 흐르는 강물일 수도, 날아가는 새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윤동주의 <서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싯다르타를 통해, 별과 노래와 죽음과 사랑과 주어진 길이 전부, 그리고 결국, '나'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됐으므로.
책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전율의 순간은 찰나였지만 주어진 감동만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