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가 떠난 후 한 달

by 연상은

사랑이를 내 위에서 재우며 쓰는 글


사랑이가 백일을 맞이하며 부쩍 사랑이 동생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랑이를 둘째라고 말해주는 사람들, 셋째 계획은 없냐고 물어봐주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지금 함께하지 못해도 우리 첫째는 열매가 맞으니까.


집에 돌아와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출생신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태어난 건 맞고 병원 기록도 있으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열매가 세상에 태어났다고 남기고 싶기도 했고. 고민을 한 건 호적을 볼 때마다 열매 앞에 사망이라는 글자가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그래도 우리 이름이 다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주민센터에 갔다. 다만 남편에게 사망신고는 조금만 더 있다가 하자고 했다. 며칠이라도 종이에 같이 있고 싶어서다. 출생신고를 하니 축하를 해주고 바우처도 신청할 수 있으니 한 번에 하고 가라는 직원의 말에 그건 인터넷으로 하겠다고 돌아왔다. 실제로 키우고 있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수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아이가 하늘나라에 갔는데 어떻게 되나요 같은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열매의 주민번호가 생겼다. 우리 셋이 나란히 있는 가족관계증명서와 주민등록등본을 몇 통 뽑아놨다.


심리상담소를 찾아갔다. 선생님은 눈물을 힘써 참고 있는 게 보였는데도 나중에는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우리 얘기가 그렇게 슬픈가 봐. 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내가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하니 상담 선생님이 열 달 동안 열매를 기다리며 가족들 모두 많이 행복했을 거라고. 그리고 태어나 얼굴도 보여줬으니 고마웠을 거라고 한다. 그 말이 너무나 큰 위안이 됐다.

내가 하는 방송들도 복귀하지 않기로 했다. 인스타도 없앴다. 다른 사람들이 내 소식을 모르면, 나만 조용히 살면 아픔도 조용해지지 않을까. 외국에 가서 살자는 말도 했다. 우리의 아픔을 모르는 곳에 가서 그렇게 살자고. 남편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멀리 떠나고 싶었다. 병원에 가서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비행기를 타도 되냐고 물었다. 그래도 수술 부위가 걱정되니 한 달은 푹 쉬라고 했다. 그리고 딱 한 달 뒤 우리는 홍콩으로 향했다. 다른 생각이 날 틈이 없이 바쁘게 여행할 수 있고 많이 걸을 수 있고 가까워서 가고 싶었던 것 같다.


정말로 다른 나라에 오니 다른 삶이 펼쳐진 것 같다. 내가 출산을 했다는 사실과 그 아기가 내 옆에 없다는 것조차 남의 이야기 같았다. 충격이 커서인지 여기가 해외라 그런지 분간이 안 갔다. 그래도 좋았다. 바쁘게 바쁘게 돌아다니니 어느새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시간이 간다는 사실 자체가 참 좋았다. 나는 알았다. 이건 시간이 가야만 살 수 있다는 걸. 나는 시간을 빠르게 빠르게 흘려보내고 싶을 뿐이다. 그곳에서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지인을 만났다. 홍콩 어느 길바닥에서 같이 울었다. 아플 때 나를 안아준 사람들과 더 가까워졌고 가깝다고 생각했으나 멀어진 이들도 많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못다 한 일들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업무 차 전화했던 분께서 “상은아. 고생 많이 했네. 근데 결국 아기가 그 아픔을 달래주더라.”하시는 거다. 비슷한 아픔이 있는 분이라 진심이 느껴졌다. 경험담이니 더 그럴 것이다. 나를 수술해 준 주치의, 같은 아픔이 있는 사람 모두 아기는 아기로 치유하는 거라고 하니 생각을 좀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내가 반드시 아기를 낳아서 이런 아픔을 준 하늘에게 꼭 보여주겠노라고.


이렇게 열매랑 이별을 하게 되어도 똑같이 임신하고 출산할 거냐고 묻는다면... 난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할 거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뭘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후회 없는 임신 기간을 보냈다. 최선을 다했고 아기도 나도 너무나 건강했고. 그 시간 동안 남편과 여행도 많이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닌 시간들이 열매가 준 선물이라 생각한다. 지금 이 헤어짐은 아픔이 아니라 우리 만남의 연장선이다.

누구나 이별한다. 우리는 좀 빨랐던 것뿐이다. 그리고 결국은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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