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나나 잘하고 살자
낮에도 집에 있다 보면 출근할 적과는 달리 같은 동 사람들과 정말 자주 마주친다. 대개는 여자들이나 학교 다니는 학생들을 본다. 게 중에는 나를 보면 큰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해 주는 중학생 아이도 있는데, 그때마다 감격에 젖는다. 세상에 한창 사춘기에 예민할 나이인 중학생이, 그것도 지나가는 동네 아줌마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해주니 그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가. 학교 선생님을 봐도 인사 안 하고 모른 체 하는 아이가 부지기수인세상에.
웬만하면 같은 동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인사성 하면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내 친정엄마는 늘 나에게 인사를 안 하고 뻣뻣하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아이를 기르다 보니, 그것도 사회성 부족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웃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라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럴 때 보면 사람은 정말 환경에 따라 간혹 변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모자가 있었다. 아이는 중학생 나이로 뵈었고 실제로 근처 중학교 교복도 입고 있었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외관상 태생적인 어려움을 지닌 친구로 보였다. 일반 학교에 도움반에 다니는 것 같았다. 중학생이지만 거의 혼자 다니는 모습은 보지 못했고 항상 엄마랑 같이 다니는 것 같았다.
전에는 아주 가끔 마주치는 정도였는데 내가 집에 있으면서부터는 하루에 두세 번 마주칠 때도 있었다. 하교하고 나면 엄마랑 같이 치료를 받으러 가거나 따로 교육을 받으러 다니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 집 엄마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위해서 오로지 아이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 중학생 아이에게도 반갑게 인사했는데 별 반응이 없고 눈조차 마주치는 걸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다음부터는 인사의 강도를 좀 조절했다. 괜히 반갑게 인사하는 것도 이상한 사람 같고 그냥 마주치면 그 엄마를 향해 가볍게 목례하는 정도였다.
더 놀라운 건 내 아이가 다니는 발달센터도 다니는지 그곳에서도 우연히 마주쳤을 때였다. 그 엄마는 나에게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는데 나는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더 이상 나에게 뭔가를 묻지도 않았지만, 속으로 그냥 이해했겠지 싶었다. '너네 집 아이도 겉으로는 티 안 나지만 뭔가 문제가 있구나' 정도로 생각했거니 싶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특성은 다르더라도 발달장애 자녀를 키운다는 점에서 일말의 공감을 순간적으로나마 눈빛에서 주고받은 기분도 들었다.
인간의 이기적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낱 미물인 나도, 그 모자에게서 약간의 위로를 받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정말 이기적 이게도 내 아이는 저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감사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의식적이지는 않아도 순간적으로 머리에 스쳐가기는 했다. 엄마랑은 웃으며 대화도 하고 소통도 웬만큼 되는 것 같았지만 딱히 친구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늘 엄마랑만 다녔으니까.
그 모자를 보면 동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약간의 연민의 마음이 들었고, 그 엄마에게는 다른 이웃들보다는 가벼운 목례 인사나마 더 정성스럽게 한 것 같다. 정말 나도 모르게 그랬다.
남편도 그 중학생 아이를 몇 번 마주쳐서 익히 알고 있었다. 아주 가끔은 혼자 다닐 때도 있었는데 조금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남에게 피해 주는 행동은 아니라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어느 날 남편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말해왔다.
"우리 주차장에 그 차 있잖아. 내가 말했던 차. 그거 진짜 비싼 건데 그 집 차였다는 거 알았어?"
"... 응?!"
나는 차에 대하서는 문외한이지만 남편은 특히 외제차라고 하면 차종과 성능 등, 한 브랜드 안에서도 급이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는 등 전문가 뺨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남편 말로 그 중학생 아이 집 차가 엄. 청. 나. 게. 고급 외제차라고 했다. 회장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중소기업 사장 정도는 돼야 탈 수 있는 급의 차인데 그만큼 찻값도 억 소리 나게 비싸고 관리, 유지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집 아버지가 정말 어느 중소기업 사장이라도 되나?
약간 의아해졌다. 인지 충돌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 불일치하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내가 봐온 그 모자의 모습과 번쩍번쩍 빛나는 고급 외제차랑은 왠지 매치가 안 되는 것이었다.
중년의 나이인 아이의 엄마분도 검소한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그 최고급 세단 외제차가 더욱 반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평소에 명품 스타일로 도배했다거나 골프복 차림으로 자주 마주쳤다면 덜 반전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남편은 그 집 차의 사양과 특징에 대해 신이 나서 설명을 하긴 했는데 이해하지 못할 말들이 대부분이었고 귀에 꽂힌 건 차 가격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후에 주차장에서 우연히 또 그 모자를 마주쳤다.
이번에는 아버지는 안 보이고 엄마랑 아들만 엄마차를 타고 어딘가에 가는듯했다.
한 번 더 놀랐다.
엄마차도 같은 브랜드의 고급 세단이었다..
순간 망치를 맞은듯한 기분은 뭔지.
진짜 부자인가 보구나.
여태껏 나 괜한 걱정 했구나.
"나 그 아이 볼 때마다 왠지 마음도 짠해지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 집이 진짜 부자인 거 같아서 괜한 걱정 한 거 같아."
내 말에 남편은 아무리 그래도 아이가 건강해서 평범하게 사는 게 좋지 속으로는 얼마나 괴로웠겠냐며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그래, 그래.. 돈이 전부가 아닌 건 맞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상황이라면 돈이 없어서 받고 싶은 치료도 못 받고 아픈 자식을 위해 해주고 싶은 것도 못해서 피눈물 흘리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거 아닐까.
사실 제목처럼 이 일화는 남 걱정까지도 아니고 그로 인해 내가 큰코다친 것 까지도 아니다. 대놓고 그 집 아이를 걱정해 준 적도 없고, 걱정을 해주기에는 얼굴만 언뜻 알 뿐이지 철저히 타인일 뿐이다.
그래도 왠지 그 아이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환경에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앞으로 아등바등 먹고살 걱정까지 할 필요 없는 형편이면 더욱 감사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내가 굳이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볼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때 어려워 보이고, 좀 힘들어 보이고, 남보다 부족한 모양새라고 해서 섣불리 불쌍하게 여기거나 동정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장애의 정도가 더 심하다고 해서 더 경증이라고 해서 더 걱정하고 덜 걱정할 필요도 없다. 중증의 장애여도 자기 나름대로 그걸 극복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 수도 있고, 경증의 어려움이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 채 왜 내 인생만 이렇게 불행하냐며 우울에 허덕이며 살 수도 있다. 모든 건 자기 마음먹기 나름 아닐까?
다시 한번 더 깨닫는다.
남 걱정하지 말고 나나 잘하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