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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종 종Mu Mar 29. 2024

화계사 소풍

점심은 동태탕

까치도 높이 집짓고 사누나

#.

손을 잡고 걸었다.


그녀는 참으로 진중하다.

어떻게 세월을 견뎠을까.

이 세상이 온통 고통이라도 조용조용 감내한 한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면 난 그녀의 이름을 댈 것이다.

예쁘냐고 물으면 그리 예쁜 건 아니라고 대답해야겠지만, 나이가 몇이냐 물으면 좀 많다고 말해야겠지만 그녀가 내 손에 잡혀 나란히 걸어갈 때 그녀의 손에서 스무 살도 안 된 느낌을 받는다.  얼마나 맘이 깨끗하면 이럴까.


복 있는 남자라야 그녀를 만날 것이다.


엊그젠 직업이 중매쟁이는 아니라도 두루 중매를 서곤 했다는 어르신을 알게 되자마자 다짜고짜 그녀의 짝을 찾아달라 부탁했다. 돌아온 대답이 그렇게 나이가 많은데 결혼하겠답디까.

아아, 그건 그녀를 모르는 소리라고 ㅡ 난 속으로 외쳤다.


그녀가 얼마나 참한데.

그녀의 생활태도가 얼마나 성실한데.

속마음은 또 얼마나 다정한데.

십 대 아이처럼 깨끗한 마음, 고생을 다하고도 때 묻지 않은 그 마음을  전할 길 없어 안타까웠다.


방금 전까지 비가 오던 흐린 날 화계사를 향해 걸었다.

주택가를 가린 나지막한 상가가 큰길 양쪽으로 이어져 있는 비교적 조용한 거리. 산사 입구에서 본채까지 얼마 걷지 않아도 되었다. 비 뒤라서 인지 땅에 서렸던 추위가 살갗에 스미어 산사에 오래 머물진 않았다. 우중충한 봄날의 숲그늘,  발도장만 찍고 내려왔다.


그녀가 사촌 이모 얘기를 했다.


중학교를 보내준다고 하여 엄마가 그녀를 그리로 보냈다고. 그런데 집안일을 시키며 구박만 하였다고. 그래도 가난한 부모님 입 하나 덜어주면 좀 나으려나 싶어 꾹 참고 1년을 식모살이했다고 한다. 휴가였을까. 1년 만에 집에 왔는데, 자신이 없어져 준 만큼 나아지지도 않은 1년 전과 똑같은 빈궁함에 너무 속이 상해 사흘을 내리 열감기를 앓았단다.


그리고 봉제공장에 취직하여 식구들을 거두게 된 것이 지금까지.


열한두 살의 어린아이가 큰 결심을 하였다.

한번 세운 결심을 되물리지도 않았다.

위대한 한 사람이다.


#.


점심으로 동태탕을 먹기로 하였다. 쭈그러진 양은그릇에 팔팔 끓는 매운맛이 몸을 녹였다.


속 시끄러웠던 나의 어제, 몇 마디 듣더니 그녀가 예전에 알던 아줌마 이야기를 해줬다.


그 아줌마에겐 까탈스러운 시엄마가 있었는데, 카탈이 어떤 정도로 심하냐면.

아줌마가 아들을 낳은 날.

시엄마 얼굴이 불만스럽고 시무룩하길래 이웃에서 물었단다.

"딸 낳았어요?"

이렇게 성별을 먼저 물은 것은, 당시 사회가  남아선호사상이 깊어 시모의 표정이  딸손주를 보고 실망한 것이라 짐작되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들 낳았소."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아들 손주가 생긴 날 시모의 표정, 그걸 전해 들을 때 며느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좋은 일조차 싫은 것, 거기에 며느리에 대한 시모의 복잡한 마음이 있었다.

그녀와 나는 이 이야기의 결론에 이르자 새삼스럽게 놀라는 맘이었다.


'어쩌면 내가 아는 어떤 이하고 똑같다?'

그녀보다 내 맘이 더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고작 12살의 아이가 학교를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거에 비하여 더 놀랄 일이 있을까.


나는 그녀의 온중함을 빌려 가슴의 상처를 지그시 누른 채 집에 왔다.


이상하게 전날에 비해 맘이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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