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가의 꽃 May 26. 2021

작약의 끝을 잡고

작약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까지 활짝 피어있던 흰 작약의 꽃잎이 테이블 위에 눈이 내린 듯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짧은 탄식과 함께 테이블 위 흐트러진 꽃잎들을 손에 하나둘씩 쓸어 담으며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한 아름다움을 남기고 간 작약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듯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작약은 눈부시듯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수식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어쩌면 꽃의 여왕은 장미가 아닌 이 작약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약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는 꽃이다.


작약의 계절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듯하다.

5월부터 한달 남짓동안 내 눈과 마음이 닿는 곳마다 간질간질한 설렘으로  나를 미소 짓게 해 줬던 작약은 이제 자취를 슬슬 감추고 있다.


지난주 수업 때 쓰고 남은 마지막 흰 작약 몇 송이가 며칠째 봉오리에서 벗어날 기미가 안 보여 꽤 나를 애태우다 이틀 전부터 서서히 꽃잎을 벌리는가 하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만개해 화려한 얼굴과 짙은 향기로 하루 동안 내 곁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리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오늘 아침, 꽃잎과 어떤 아련함과 쓸쓸함까지 함께 나에게  떨군 후 올해의 마지막 작약은 이렇게 나와 작별을 고했다.


작은 꽃봉오리 순간부터  꽃 잎을 벌릴 듯 말 듯 부풀어 오르는 가장 설레는 순간을 지나 갑자기 팡하고 얼굴을 활짝 드러내며 꽃잎을 사방으로 펼치는 화려한 순간까지 작약의 짧지만 아름다운 만개 과정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나에게 전달한다.


설렘, 황홀함, 아련함, 씁쓸함까지 이런저런 떠오르는 감정들로 내 마음을 밀어내고 일렁인다.


많은 꽃들 중에서 유독 작약이 왜 그러한 기분을 들게 하는 걸까

아마 간질간질한 설렘에서  허무함이 밀려오는 씁쓸함까지를 겪는 감정의 과정이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 짧고 강렬하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약이 지고 나면 달콤했던 꿈에서 깬 후 느꼈던 멍하면서도 아쉬웠던 기분 혹은 어린 시절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신나게 놀다 갑자기 친구들이 우르르 집으로 돌아간 후 창 밖 석양을 지는 모습을 볼때의 알 수 없는 씁쓸함과 서러움이 몰려오던, 그때 그 기분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작약의 마지막을 좀 더 붙들어 두고 싶은데 내 마음도 모르고 속절없이 후드득 떨어지는 꽃잎을 볼 때면 괜한 야속함마저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작약이 피기를 기다리던 애태우던 마음, 꽃잎을 벌렸을 때의 희열, 그리고 만개했을 때 내 곁을 매우던 짙은 향의 기억 모두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만큼 서운함도 큰것일것이다.


우리 인생의 잊을 수 없는 행복했던 찰나의 기억은  어떤 기억보다 깊게  각인되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때 그 공기의 냄새까지 기억나게한다. 그리고 그 짧고 아름다웠던 기억은 우리가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강한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하고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이 우리를 붙잡아 주기도 한다.  마치 작약의 순간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늘 기억하고 있기에 언제든 작약을 떠올리면 그때 느꼈던 감정과 그때의 우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과 달리 작약은 내년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작약을 보내는 이 순간 또한  아쉽지만 또 그렇게  작별을 하고 새롭게 만개할 작약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과정 속에서 작약의 아름다웠던 기억을 문뜩문뜩 떠올리며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싶다.


 

이전 05화 수국, 네가변한다 해도 괜찮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