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가의 꽃 Feb 18. 2021

수국, 네가변한다 해도 괜찮아

수국

한때 수국을 참 좋아했었다. 다양한 컬러의 수국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내 기분도 함께 간질간질, 몽글몽글해지며, 색색의 동글동글한 얼굴들이 그렇게 탐스럽고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4계절 내내 수국을 바라봤었다.

당시 내 꽃 작업 사진을 보면 수국이 빠진 사진이 없을 정도로 나의 수국 사랑은 깊었고,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동글동글 공 모양의 수국도, 중앙의 꽃을 레이스로 둘러싼 것처럼 보이는 레이스 캡 수국도, 라임빛 컬러가 너무 매력적인 목수국도, 드라이가 되는 앤티크 수국도, 모두 모두  내 품 안의 꽃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자리 잡고 있었다.


수국은 흙의 성질에 따라 색이 변하는 꽃이다. 산성토양에서는 파란색 꽃이 피고 알칼리 토양에서는 분홍색이나 빨간색 꽃이 핀다. 그래서 토양에 첨가제를  넣어 원하는 색의 수국으로 바꾸기도 하는 신비한 특성을 가진 꽃이다. 시시각각 꽃 색이 변한다고 해서 일본에서는 칠변화라고도 불리며  '변심' '변덕'이라는 꽃말도 가지고 있다.



꽃말이 '변심'이라서 그런 걸까

최근 몇 년간, 나는 꽃시장에서 수국을 봐도 애써 지나쳐 버렸었다. 더 이상 내 꽃 작업에는 수국이 들어가지 않았고 수국을 봐도 설렐 수가 없었다.

수국을 향한 내 마음이 변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변심에 대한 비겁한 변명을 조금 하자면  수국을 바라보던 누군가의 눈빛이 떠올라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 핑계로 나는 수국을 오랜 시간 외면했었다.


4년 전, 지방에 살던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 지인의 전시회 축하 꽃바구니를 직접 배달하러 간 적이 있었다.

멀리 서라도 내 꽃을 생각해준 친구의 마음이 고마웠기에 가격대랑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수국을 한가득 바구니에 담았다. 수국을 메인으로 수국이 4대, 사이사이 장미와 필러 플라워들이 아낌없이 들어간 내가 봐도 꽤 멋진  꽃 바구니였다.  혹 조금이라도 흐트러질까 배송을 맡기지 않고 직접  배달을 나섰다. 1시간이 넘는 꽤 먼 거리였지만  어서 전달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막히는 도로 안에서도 힘이 들지 않았다.


갤러리 근처에 다다랐는데 주소가 잘못됐는지 그곳은 나오지 않았고 주변을 몇 바퀴 뺑뺑 돌고 나서야 주소지와 조금 다른 곳에서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또 웬걸, 갤러리 문이 닫혀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그 앞에 차를 정차하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갤러리 앞을 서성거렸다.  


시간이 꽤 지나서야 갤러리 문이 열리고 한 여성분이 나왔다. 나를 향해 씩씩 거리며 다가오더니 대뜸 당장 이곳에서 차를 빼라며 신경질적으로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본인이 계속 안에서 지켜봤는데 왜 자꾸 앞에서 기웃거리느냐며  대답할 틈도 없이 쏘아붙여댔다.  타인의 느닷없는 나를 향한 분노에  내 머리와 마음은 순간 정지된듯했다. 심장이 떨렸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상했다.

꽃을 배달하러 왔으니 꽃만 전달해드리고 바로 겠다고 부탁드렸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안된다고 했어요, 당장  빼요."라는 드라마 속에서나 듣던 앙칼진 대사였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넓은 이면도로였다. 나와 그 여자뿐이었다.  이 수치스러운 장면을 아무도 보지 않았다는 것만이 조금 위로가 되었으려나.


모멸감에 온몸에서 땀이 눈물처럼 흘렀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마무리해야 했기에 차를 옮기고 꽃바구니를 들고 갤러리로 들어섰다. 엉망이 된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며  작가님께 꽃바구니 전달을 부탁드린다며 그 여성에게 말을 건넸다.  내 꽃을 흘깃 한번 쳐다보더니 나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다시 뒤돌아서서 "거기 바닥 아무 데나 두고 가요."라는  짜증과 경멸이 섞인 대답이  나에게 돌아왔다.

  

그 순간 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했었다. 하지만 나의 꽃을  이런 곳에 '아무 데나' 두고 나갈 수는 없었다.  떨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불법 주정차 구역이 아니기에 주차를 했던 건데 제 생각이 짧았네요 기분이 상했다면 죄송합니다. 바구니 안에 지인분 카드도 있으니  잘 전달 부탁드릴게요." 라며 내 안에 남은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모아 정중히 말했다 그러고 나서 바구니를  중앙 테이블에 올려두고 나서려는데  "전달할게요"라는 다소  머쓱한 목소리가  내 뒤로 들려왔다. 나는 비굴하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한 번 더 남긴 채 꽃바구니를 그곳에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하게 나와버렸다.  


그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아이처럼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내가 느꼈던 그 순간의 모멸감보다 내 꽃을 향해 던지던 그녀의 경멸에 찬 눈빛을, 그곳에 덩그러니 남아 나 대신 견디고 있어야 할 나의 꽃이 떠올라 더 견디기 힘들었었다. 그 이후로 난 수국을 볼 때마다 그날 두고 온 내 감정과 수국 바구니가 함께 떠올라 결국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작 그런 사람 때문에 내가 좋아하던 꽃을 외면하는 나의 나약함과 비겁함이 너무 싫었다.  왜 그 자리에서 당당한 태도로 대응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늘 뒤에서 후회만 하는 사림인 걸까. 자기 비하의 고리는 끝이 없어 결국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데 까지 왔고 결국 나는 이 일을 계속해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타인의 태도로 인하여 받은 상처가 온몸 곳곳으로 팔을 뻗어 나를 옭아매고 결국은 나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지난 사진을 정리하다 그 꽃바구니를 발견했다.

순간, 이제는 정말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태도에

내 기분이, 내 삶의 방향이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돌을 던진다면 잠깐만 아파하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담담하게 살아내길 바랬다.

기분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내 안의 본질적인 것들은 지키고 싶었다.


토양의 성질에 따라 색이 변하는 수국이라고 한들, 색은 바뀔지언정 본인 자체가 수국이 아닌 것은 아니듯,

나 또한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에 따라 내 기분이 변할 수는 있어도 그 기분으로 내 존재를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수국의 시시각각 변하는 색이 수국을 정의하지 않듯, 나의 매일 변하는 생각과 감정이 내 전체를 규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날의 감정이 떠오른다 할지라도 그 감정이 오늘의 나를 더 이상 해칠 수는 없다.

그날의 기분은 그날 거기까지 일뿐이다.

더 이상 수국에 그 상처를 이입하면서 까지 매번 그날 일을 여기로 가져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난 더 이상 수국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수국의 색이 변한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던 수국일 뿐이다.

수국을 향한 내 마음이 변했었다 한들 결국 수국은 늘 같은 수국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수국이 나를 향해 말한다.

"네 마음이 변했어도 난 괜찮아."

나도 수국을 향해 넌지시 내 마음을 전한다.

"이제는 그때 그 나약했던 내가 아닌, 조금은 더 단단한 내가 되어 그동안 못 품었던 두 팔로 너를 가득 안을게."

 









 











이전 04화 나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꽃, 장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