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곡가 이승규 Sep 23. 2020

육감(肉感)이 아닌 육감(六感)

예술가의 육감적인 에너지는 치유와 정화의 기능

※ 광주매일신문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전 세계가 시끄럽기만 하다. 우리나라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집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며 외출도 껄끄러운 사태까지 오게 됐다. 상대방의 기침과 재채기는 놀라 쳐다보기 바쁘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생각했던 일상은 꿈이 돼가고 있고 무대와 객석은 텅 빈 채로 예술가와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박물관, 공연장, 미술관, 체육관은 가장 먼저 폐쇄가 됐고 봄을 맞이한 지자체 축제들은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이런 시국에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적 확산에 따라 활동이 위축되고 예민해져 버린 상황에서 오는 우울증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확산으로 인한 스트레스, 의심, 공포, 무기력함을 지칭하는 말이다. 감염병 발생에 대한 정보검색에 집착하고 의심이 많아져 주위 사람을 경계하며,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외부활동이 줄어들어 무기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로 인해 두통, 불면증,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특히, 계속되는 언론의 보도와 사람들의 걱정으로 인해 ‘코로나 19보다 더 무서운 병이 코로나 블루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든다.

이런 혼란한 시국,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은 예술로 둘러싸여 있다. 

인간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통해 감각 기관을 지나 자극을 받아들인다. 이런 오감의 자극만 존재하는 것인가. 감각 기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인간의 감각 기관이 다섯 가지 이상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들었을 때 색깔이 보이거나 글씨를 보는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을 공감각(共感覺)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것을 육감(六感)이라고 말하고 싶다. 19세기 말부터 학자들의 연구가 돼 인상주의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줬다. 인상주의 작가들은 뉴턴의 광학론은 빛의 파장과 스펙트럼을 제시함으로써 과학적인 관점을 알렸고, 괴테의 색채이론을 인간만이 볼 수 있는 색에 대해 알려줬다. 그 중 대표적인 화가는 칸딘스키다. 칸딘스키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렌그린’을 감상한 후, 여러 색과 형태들이 떠올랐고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화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특히 1911년 동료화가들과 함께 참석한 음악회에서 조성이 없는 무조음악으로 작곡된 쇤베르크의 6개의 피아노 소곡을 감상하면서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본인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다. 도형을 색으로 표현하거나 색을 악기로 표현했다. 선과 면, 색채에서 다양한 악기가 연주되는 작품, 음악적이면서 동시에 회화적인 작품이 등장했다. 나 또한 지난해 발표했던 첼로소나타 ‘초월’을 통해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됐다. 화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 곡은 그림에 대한 인상과 느낌을 첼로의 다양한 음폭과 효과로서 관객에게 시각과 청각을 자극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관객도 또한 “단순히 그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음악을 통해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평소에 이런 부분에서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공감각은 쉽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의 자극을 통해 다양한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 곡을 들어보자. 나는 이 곡을 들으면 힘들었을 때, 슬펐을 때가 기억이 난다. 당시의 회상하며 음악을 통해 위로가 돼준다. 

나는 이것 또한 육감(六感)이라고 말하고 싶다. 육감적이라는 의미는 하나의 자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자극의 드라마를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육감의 자극은 어떤 자극보다 강렬하며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다시 그 경험을 하고 싶어한다. 필자는 이런 육감적(六感的)인 느낌은 예술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모든 학문 중 가장 순수의 영역이라 자부한다. 

순수하다는 것은 오염되지 않고 불순물이 없다는 뜻이다.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지 않을까.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적 감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레 치유가 되고 정화가 된다. 치유와 정화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아프거나 더러워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위로, 치유. 결국, 우리는 회복을 원한다. 그 회복은 거창하지도 않다. 바로 일상의 회복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학교에 다니며, 직장인들은 퇴근 후 술자리도 갖는다. 예술가들은 의료진처럼 본인의 영역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예술가들은 무대를 잃었고 관객을 잃었다. 전시장소를 잃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서도 오프라인의 한계성을 넘어 온라인 플랫폼으로 넘어가 예술가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고 있다. 온라인을 통해 집에서 연주하는 동영상들을 올리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베란다에서 연주자들이 자유롭게 연주한다.

유투브를 통해 공연장을 잃어버린 저자에게도 하나의 대안이 되고 있다

                                                                                        



다시 한 번 질문해 본다.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현 시점의 예술가의 역할과 기능은 코로나 블루로 확산돼버린 마음의 병을 예술가들의 육감(六感)적인 에너지를 통해 하루 빨리 일상의 회복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백신인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