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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적절한 대처의 순간

by 김소연



#11. 적절한 대처의 순간





모든 건 다 때가 있다




퇴근 시간 유동인구가 많은 전철역 입구. 나는 어... 어... 어... 소리와 함께 수많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고, 이내 나는 길바닥에 엎어져서 사람들의 분주한 발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발 구경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신발엔 인격이 담겨있다. 반짝반짝 광을 낸 구두와 흙범벅이 된 운동화, 꺾어 신은 신발... 내가 저들과 눈높이를 맞췄다면 얼굴을 보고 어떤 신발을 신었을지 맞춰볼 테지만 반대로 신발을 먼저 보는 것도 괜찮았다. 다만 엎드려 있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얼굴을 살피지 못했다. '나는 넘어진 게 아니라 신발을 구경 중인 거야. 그래. 이 사람들이 거의 다 지나가면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어나서 걸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인파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발 구경은 한참을 이어졌다.



누워있는 내 곁을 지나는 부분의 신발은 나를 피해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인파가 조금 사그라들기 시작할 때쯤 이제 일어나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떤 운동화가 주춤하더니 내 옆을 순회했다. "저 괜찮으세요?" 아주 다정한 물음에 괜찮다고 작게 속삭였다. 그 운동화의 주인은 내 작은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상체를 한껏 숙여 내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얀 운동화처럼 말쑥한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제발 그냥 지나가 주세요.' 속엣말이 밖으로 나오려다 도로 들어갔다.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제발 나를 내버려 두고 지나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는 친절하게 나를 일으켜 세워주기까지 했다. 그러자 나를 못 본 척했던 주위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주변의 시선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나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냅다 달렸다.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웅성이는 사람들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지 않은가.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건 그쪽이었다. 누군가 곤경에 처했을 때, 모른 척 그냥 지나치는 걸 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다. 그래도 훗날 다시 그를 만나면 고마웠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다시 우연히 를 만났을 때 나는 저승사자라도 만난 것처럼 질겁하고 도망쳤다. 고맙다는 말도 때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이후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걸었고, 덕분에 사람들의 신발 구경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만, 나의 취미였던 사람들과 신발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건 그만두었다.







시간은 늘 엇갈린다




나는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늘 말싸움에서 졌고, 무언가 잘못하지 않아도 끝내는 내가 잘못한 게 되는 일이 허다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불구경 싸움 구경이다. 친구와 말싸움이라도 할라치면 곁에는 구경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 말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늘 싸움에서 열세였다. 여자 아이들은 왜 그렇게 쉬지 않고 말을 잘하는지 어버버 하며 더듬대는 나는 구경꾼들을 홀릴 만큼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큰소리를 치며 악을 쓰던 상대 아이는 결국 자기 분에 못 이겨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아이들 싸움엔 상대의 코에 코피를 터뜨리는 자가 승자, 여자아이들 싸움엔 자신의 눈에 눈물을 터뜨리는 자가 승자다. 나는 씩씩거리고 집으로 와서 다음에 친구와 싸우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시나리오를 써두었다. 하지만, 같은 일로 싸우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 길이 아니오 친구




인천 소래산은 완만한 둘레길로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소래산 등반을 처음 할 때였는데, 등산로 입구에서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쉽게 길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나는 오른쪽길, 친구는 왼쪽길을 선택했다. 사람들을 살펴보니 왼쪽길로 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오른쪽길을 선택했고 자연스럽게 내가 원하는 대로 오른쪽길로 들어섰다. 속으로 '나는 촉이 좋은 사람이라고 친구야'하고 조금 으쓱대고 있었는데, 조금 걷다 보니 급한 경사길이 나왔다. 초보자인 우리가 보기에 그 길은 마치 암벽등반 수준의 길이었다. 나는 뒤로 돌아갈 수 있는지 돌아봤다. 하지만 그 산길은 아주 좁았고, 빽빽이 줄지어 사람들에게 떠밀려 앞으로 전진해야 했다. 다행인 건 내 손에는 예쁜 핑크색 등산 장갑이 끼어져 있었던 거다. 하지만 친구는 맨손이었고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만 이런 길일 거야. 곧 완만한 둘레길이 나올 거라는 내 위로는 전혀 친구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산의 중턱까지 우리는 암벽등반을 했다. 손을 부들부들 떠는 우리를 보며 위태로워 보였는지 뒤따르던 아주머니는 걱정을 한가득 늘어놓았다. "아까 갈래 길에서 왼쪽길로 갔어야지." 그랬다. 오른쪽길로 오는 사람들은 둘레길이 아니라 암벽길을 스스로 선택한 거였다.



오르는 내내 불만을 터뜨린 건 친구가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미안한 건지 화가 났는지 모를 마음이었다. 결국 한 시간 반이 걸린다는 둘레길 대신 삼십 분 만에 정상에 도착해 서로를 보며 실실 웃었다. 사람들은 암벽길로 오르고 둘레길로 내려가는 모양이었다.






타이밍이 중요해







친구네 집 앵무새는 아주 말을 잘했다. 단순히 말소리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춰 말을 했다. 어린아이 같기는 했지만 제법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았다. 새가 저렇게 지능이 높았는지 놀라웠다. 더욱더 놀라웠던 건 그렇게 똑똑한 앵무새가 바닥을 걸어 다니며 여기저기 변을 보고 있는 거였다. 그 와중에도 친구와 앵무새는 대화중이었고, 친구는 앵무새를 따라다니며 변을 치웠다. 새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변을 본다. 귀여운 앵무새를 키우려면 바닥에 널린 똥은 견뎌내야 한다.



젠가 그 친구와 길을 가다가 시끌벅적한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한 명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는데, 아이의 검은 모자에 흰 얼룩이 진걸 보니 새똥을 맞은 거였다. 아이들은 더럽다며 모자를 벗으라고 하고, 왜 하필 나무 아래에 서있었냐 질책하는 아이도 있었다. 모자에 새똥이 묻은 아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래도 모자에 맞아서 참 다행 아닌가. 앵무새를 키우는 친구는 아이 곁으로 가더니 물티슈를 꺼내어 모자에 묻은 새똥을 쓱쓱 닦아냈다. 새똥은 냄새도 안 나고 잘 지워진다. 그냥 마르기 전에 닦아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적절한 대처를 하려면 타이밍이 중요했다. 누가 내게 똥을 던지면 조금 당황스럽겠지만 마르기 전에 잘 씻어내면 그만이다. 어차피 던진 사람의 손에도 똥이 묻었을 테니 말이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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