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hiara 라라 Oct 28. 2022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태도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건축을 할 때 학교에서도 설계사무실에서도 남자들과 싸워서 이기려고 들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늘 경쟁하고 있었다.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는 건축은 당연히 처음이고 새로운 세계였다. 재능이 있다는 것이 눈에 명확히 보이는 동기나 선배들을 보며, ‘설계’라는 것과 ‘디자인’이라는 것은, 열심히 한다고만 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았다. - 뭐든지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슬프지만 인정한다. - 이런 나의 한계를 깨닫고 많이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아서 열심히 하니까, 장학금도 받고, 과 조교도 하고, 과 대표도 하게 되었고, 방학 때에는 유명한 건축가인 한 교수님의 사무실에서 일할 기회도 생겼다. 그러면서 내가 건축을 조금이라도 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회는 만만치 않았고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도 졸업하고도 나는 계속 거절당했다.
사실 건축학과에 입학하면서 국내에서의 공부만으로는 건축가가 되려는 내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틈틈이 나름대로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일단 유학 가려면 토플을 해야 된다는 말을 듣고 토플 공부를 시작했다.
초등학교가 끝날 시간이 되면 학교 근처에서 학습지나 학원을 홍보하고 있는 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중, 고등학교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데, 그건 아이들이 별로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등학생은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학습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관심을 많이 갖고 계셔서 그런 홍보가 잘 받아들여지는 편이다. 이건 어학원에 입사해서 캠퍼스를 홍보하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다. 이렇듯, 대학교도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교 곳곳에 토플이나 토익 같은 어학 관련 홍보를 하는 분들이 눈에 많이 띈다. 대학 1학년생들은 무엇에든 열정을 발휘하는 나이이기에 다른 학년에 비해 어학에 관심이 많다. 나도 관심 많은 1학년생이었고 이 책들을 통해서 스스로 열심히 공부할 줄 알았다. 비싼 돈을 들여서 그 토플 관련 교재 패키지를 구입했다. 몇 년 동안 공부를 거의 하지 않으면서도 절대로 속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나에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속았다. 차라리 그 돈으로 학원에 다닐 걸 그랬다. 한참 뒤에 그 책들을 살펴보니 정말로 공부하고 싶지 않게 구성이 되어 있었다. 영어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그런 책으로 어떻게 그것도 혼. 자. 서. 공부를 하겠는가? 첫 번째 시도는 실패.
그때는 영어에 '영'자로 모르는 때였다. 언어라는 것은 굳은 의지만 갖고 있으면 누구나 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경험을 하고 난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영어든 공부든 일이든 무엇이든지 흥미와 재미가 있어야지 꾸준히 할 수 있고, 꾸준히 하면 실력이 향상될 수 있다는 걸.
일부러 공부 차원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나는 책이 너무나도 좋고, 그 책을 쓴 작가가 자신의 언어로는 어떻게 그 내용을 표현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래서 듣게 된 수업이 일본어과의 기초 일본어 수업과 영문과의 영미문학의 이해였다. 아무것도 배운 적이 없는 순수 이과생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공부였지만 수업을 듣는 것 자체는 참 재미있었다. 재미라는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관심이 생기면 조금이라도 어딘가에 남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다. 실질적으로 내가 나중에 토플을 제대로 공부했을 때, 이때 들었던 영문과 수업은 문학 관련 지문이 나올 때마다 그 지문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나는 아무거에나 호기심이 많았다. 그 대상이 나에게 이익을 주든 주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덕분에 여행도 많이 다니고, 이런저런 핑계로 주위의 사람들을 쫓아다니기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내향적인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고 많은 경험을 하고 다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대학생의 패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경험은 삶을 조금 더 넓고 여유롭게 바라보는 자세를 갖게 해주나 보다. 지금도 호기심이 많기는 그때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예전처럼 모든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엔 지금의 난, 생각이 너무 많다.
결국 유학은 가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설계 사무실에서 겨우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작은 사무실에서의 시작 덕분에 일을 많이 배웠고 합사(합동사무실 :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여러 회사에서 각 분야에 맞추어 공동으로 작업을 한다. 설계, 설비, 인테리어 등 다른 회사들이 합동으로 사무실을 꾸려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작업하는데 이를 합사라고 말한다.)에 나가서 많은 회사들과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때 진행되었던 작업은 신도시 프로젝트였다. 우리 회사는 규모가 작아서 다른 설계 사무실과 함께 설계를 담당하는 하나의 팀으로 합사에 참여했다. 합사에 참여하면 다양한 회사의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같이 외부 경력이 없는 직원은 합사에 보내지도 않을뿐더러 참여하더라도 무시당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우리 사무실에서는 진행되던 다른 프로젝트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만만했던 내가 대리라는 직책으로 명함까지 받아서 합사에 참여했다. 1년밖에 안 된 경력으로 대리의 직책을 받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회사에 누를 끼치면 안 되었기에 몰라도 아는 척을 해야만 했다. 물론 옆에서 나의 모든 행동을 불안해하며 챙겨주었던 과장님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합사에는 규모가 꽤 큰 설계사무실이나 기업도 있었다. 그런 곳의 시스템도 배울 수 있었고 (엄청 부러웠다.) 설계 이외의 건축에 필요한 시공, 인테리어, 설비 등 파트와의 협업 과정도 흥미로웠다. 특히 20대의 동료들과 함께 일해서 좋았다. 밤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하다가 한두 명씩 퇴근하고 조용해진 사무실에서 우리 20대 사회 초년생들은 눈짓으로 복도에 나와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 각자 속해 있는 사무실의 이야기, 인생에 대한 이야기... 그 시간이 참 소중했다. 그래서 힘들었지만 잘 견딜 수 있었다. 작업은 거의 새벽 3-4시까지 이루어졌고, 택시를 타고 집에 와서 씻고 1-2시간 잠을 자면 또 출근해야 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나는 여자라고 집에 보내는 주었다. 남자 직원들은 대부분 합사 근처에서 숙식했다. 합사가 강남 한복판에 있어서 매 끼니를 비싼 밥으로 해결해야 했고, 출근 시간 지옥철을 타며 고생했지만, 그때가 많은 것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했던, 내 건축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 중의 하나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존경할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롤모델이 외부에 있었기 때문에 설계 사무실에서는 더욱 정을 붙이지 못했던 것 같다. 입사하고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 합사에 나가서 오랫동안 일 했던 것도 사무실에 정을 붙이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무실에 동료는 없었고 여자 직원도 나 혼자였고, 나 빼고는 다 경력이 많은 남자 직책자들이었다. 사실 다들 분들은 나에게 잘 대해 주셨다. 문제는 이사님 하고만 있었다. '님'자는 붙이고 싶지 않다. 그만큼 나를 괴롭힌 사람이다. 성차별적인 발언은 기본이었고, 성희롱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그때는 어느 누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고, 그저 모든 것을 견뎌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큰 회사에 취업했으면 일을 배우는 속도가 많이 느렸을지는 몰라도 동료들이 있으니까 함께 풀어나갈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동료가 있었으면, 여자 직원이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어쩌면 이렇게 이사님과 싸우고 짐을 싸서 사무실을 그날로 나오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수술을 한 번 하고 재활치료를 하고, 좀 괜찮아져서 다시 취업한 거여서 몸을 그렇게 힘들게 하면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건축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합사도 재미있었다.
사무실에서 얼마 되지 않은 짐을 싸들고 나오는 그 순간, 어쩌면 마음속에서는 건축과 이별을 고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장님이 외출 중이었을 때 벌어진 일이어서 그 후로 사장님께 여러 번 연락이 왔지만 나는 다시 그 설계 사무실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마지막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못했겠지만, 그것이 건축과의 마지막이었다. 나의 미래는 너무나도 불투명해져 버렸다. 어렸을 때는 발레리나, 그 이후에는 건축가만을 꿈꾸어 왔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은 정말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 같다. '선생님'이라는 미래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 영어 선생님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난 영어가 좋다. 아이들과 함께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이끄는 것도, 나도 성장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도 모든 것이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