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텃밭_11月
텃밭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당시에는 직접 기른 배추와 무로 김장을 할 수 있을 거라 꿈에도 몰랐다. 초보 농부에겐 앞으로 차차 도전해 볼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을 뿐이다. 특히 배추는 난이도 상 작물이라 겁이 났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배추의 난이도 보다도 치솟은 배추값이 더 무서워서 이번 농사가 망해도 앞으로를 위해선 도전해 마땅했다.
수확의 경험이 조금씩 쌓여간 봄이 지났고 자신감이 조금 생긴 여름에 '그래도 한 번?' 모험으로 배추와 무를 심었다. 그리고 벌써 한해 텃밭의 끝자락에 이르러 김장 채소를 수확하는 날이 다가왔다. 이제는 바쁜 농번기는 끝이 나고 슬슬 기나긴 겨울을 준비할 시간이다.
작물 수확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마지막인 법이다. 농사에 있어서 한해의 가장 큰 이벤트는 김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초보 농부가 이 이벤트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다.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농사는 단순히 초심자의 운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더욱 어려워졌다.
배추
김장이라는 월동 준비를 위해서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은 바로 배추를 키우는 일이었다. 김장김치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주재료이며 키우기 어려운 작물 중 하나이다.
노하우랄 것도 없는 초보 농부지만 괜히 텃밭에서 봄과 여름을 보낸 것이 아니다. 봄에 키운 열무와 루꼴라를 통해 밭의 벌레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물 조절이 어렵다는 토마토를 수확해 보면서 '물. 은. 적. 당. 히'라는 작물의 애매한 기준에서 줄타기도 해보았다. 그런 경험이 배추를 길러내는 데에 어느 정도의 감을 갖게 해 주었다.
돌아보면 위기의 순간들이 참 많았다.
생각보다 배추벌레는 징그러웠다. 젓가락이든 손으로든 하나하나 배추에서 떼어내야 하는데 이때 농약을 뿌릴까 말까 고민을 참 많이 했다. 더운 날씨에 벌레를 잡고 있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엔 인터넷에서 온갖 천연 농약재료를 찾아보고 식초, 막걸리, 소주 등 돌아가며 뿌려보기도 했다. 그런 노력이 먹힌 건지 벌레들에게서 배추를 지켜낼 수 있었다.
또 배추 밭 주변에는 멋들어지게 자라는 향나무가 하나 있다. 하늘이 예쁜 날엔 향나무 쪽을 한 번 쳐다보며 '이것이 바로 힐링!'이라며 외쳤었다. 그러나 사람은 참 간사하게도 향나무잎 때문에 나무를 향한 나의 시선이 다소 달라졌던 시기가 있다. 배춧잎 사이로 잔뜩 향나무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한랭사로 위기를 모면해 멋진 풍경을 지금까지도 간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 빨리 추워지는 곳에 밭이 위치해 수확 전 환절기에는 일기예보를 주시해야 했다. 까딱하다가는 여름부터 열심히 키운 작물이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냉해를 입어서 못쓰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역시 배추는 하이라이트 작물이라 할만했다. 일 년 농사의 경험치들을 쏟아부어 배추를 길러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
원래도 좋아했지만 앞으로도 더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커진 농작물이다. 그냥 심어두기만 하면 알아서 잘 자라니 최고의 작물 조건을 채우고도 남는다. 모종으로 키우면 무를 빨리 먹을 수 있고 파종을 해서 키우면 그저 조금 늦게 먹을 수 있는 정도다. 작물 자체가 예민하지 않고 순해서 길러내는 입장에서는 편하다.
무는 김치, 시래기, 짠지(절인무)까지 다양하게 월동준비가 가능하니 최대한 많이 심었다. 올해 가장 잘한 선택이다.
순무
지역특산물 정도는 직접 길러봐야 지역민으로서의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강화도에는 유명한 지역특산물들이(사자발약쑥, 강화포도, 인삼, 강화 속노랑고구마, 새우젓 등) 있지만 그중에서도 강화순무는 강화를 대표하는 특산물이기도 하다. 김치로도 만들 수 있으니 월동준비를 하는 데에는 완벽한 지역특산물이다.
키우는 방법은 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땅 속에서 자라는 작물이기에 간격을 조금 넓게 파종하면 땅속에서 시원시원하게 커간다. 그리고 농사 베테랑처럼 잡아 살살 흔들며 수확하면 끝이다.
월동 준비의 꽃, 김장
온 가족이 모여 김장을 하긴 했어도 수확부터 시작한 것은 처음이라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배추는 반타작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을 수확했고 무와 순무는 감히 완벽했다고 말해본다.
겨울이 오기 전 이렇게 김장을 하며 한국인 월동준비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 이리도 감격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아주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몇 년간의 외국생활을 하면서 가장 그리웠던 한 가지는 바로 김치였다. 시판용 김치를 아시안마트에서 사 먹긴 했어도 영 채워지지 않는 맛이었다. 김치를 싫어하던 유학생들도 외국에서는 찾을 수 밖에 없는 음식이다. (실제로 김치를 싫어하던 한국인 친구가 외국살이 하면서 직접 담가먹는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채워지지 않는 맛은 이런 과정의 부재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는 가득 채워진 김치의 맛을 볼 수 있다니 설렌다.
항아리 심기
김장채소도 기르고 김장도 했으니 하는 김에 항아리도 묻어보기로 한다. 할아버지댁에 있던 쓰임이 멈춰진 항아리 중에서도 가장 멀쩡한 것들만 골라 깨끗이 닦아냈다. 숨을 쉬는 항아리라고 해서 퐁퐁과 같은 세재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식초로 열심히 닦아냈다. 긴 세월 잠자던 항아리를 다시 깨우는데 이 정도는 할만한 일이었다.
적당한 자리를 골라 항아리 크기에 맞는 구덩이를 파서 항아리에 땅 속에 심었다. 그리고 대형 김장용 비닐을 넣고 담근 김치를 한 포기 한 포기씩 차곡차곡 넣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역사교과서 한 페이지에 나오는 사진 한 장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맛있는 김치를 위한 기다림
인내심을 장착하는 것으로 김장은 마무리된다. 맛있는 김치를 먹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겐 이런 기다림 조차 낭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김치든 작물이든 돈을 주면 빠르고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말이다. 누군가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들여 농사를 짓고 먹을 만큼만 수확해서 어디서 팔지도 못하고 돈도 안되는데 왜 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들에게 우스갯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를 그런 답변을 한다.
"저는 태어난 곳이 강화도인데 어릴 때 학교 소각장에 북에서 날아온 삐라(불온선전물)도 주워본 적이 있고 마을에 울려 퍼지는 대북, 대남방송도 들은 적도 있어요. 민방위훈련 때는 우연히 간 가게 안에서 내려진 셔터 사이로 지나가는 탱크들도 봤고요. 전에는 몰랐지만 전쟁에 대해서 꽤 두려움이 있더라고요.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죠. 그래도 혹시나 하는 해서 전쟁으로 인한 식량난에 대비해 뭐라도 캐 먹을 줄 알아야 하고 길러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웃지만 놀랍게도 꽤 진심이 가득한 답변이다.
무청시래기
조금만 부지런하면 버릴게 하나 없는 텃밭이다. 김장을 하고 나면 수많은 무청이 남겨진다. 남겨진 무청을 물론 그냥 버릴 수도 있지만 농부의 마음으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절대 그럴 수가 없다. 겨우내 잘 말리면 맛있는 시래기가 되기 때문이다.
무청을 잘 말리기 위한 방법들을 찾다 보니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돋보이는 방법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선택한 방법은 옷걸이를 활용한 것이었다. 집에 널린 게 옷걸이고 무언가를 거는 것이 전문인 도구이니 이만한 게 없다.
무청시래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무를 수확할 때 꼬다리 부분을 좀 넉넉하게 잘라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풀어지지 않고 한 번에 잘 걸어둘 수가 있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쭈르륵 걸어두면 추위와 바람을 맞으며 맛있게 말라간다. 두 달 이상 지나면 무거웠던 무청이 가벼워지고 때가 왔다.
물에 시래기를 반나절 이상 불린 후 끓는 물에 30분 이상 잘 삶아준다. 그리고 야들야들해진 무청에는 투명한 껍질이 있는데 그걸 제거하면 식감이 훨씬 부드러워진다. 하는 도중에 껍질 있는 것과 없는 것 둘 다 먹어봤는데 차이가 꽤 컸다. 나중에 찾아보니 벗기지 않고도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처음이니 정석대로 해보는 것도 좋은 듯하다.
여전히 자란 잡초 김매기를 해야 하는데 점점 텃밭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풍경처럼 바뀌어간다. 푸른빛도 조금씩 사그라든다. 비닐하우스가 없는 나의 텃밭은 월동을 위한 작물들 빼고는 한해 텃밭 농사는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텃밭을 뒤따라 나 스스로를 위한 월동 준비를 해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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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힙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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