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텃밭_10月
완연한 가을.
모든 것이 색을 바꾸며 무르익어가는 것이 보여지는 계절.
애국가에서도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라는 가사처럼 참으로 하늘이 파랗고 높다. 가을은 보통 떨어지는 낙엽에 쓸쓸함으로 대표되지만 나에겐 벅찬 설렘을 준다. 부는 바람이 시원해 땀도 나지않고 발걸음도 가볍고 자꾸만 밖을 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앞으로 남은 한 해 중 밭일을 가장 편한 날씨 속에서 할 수 있는 시기는 지금 뿐이라는 것이다.
가을바람맞으며 시원하게 수확
고구마
- 심은 시기 : 6월 초
- 수확기 : 10월 초 (보통 9월 하순부터 10월 중순)
고구마순이 멀칭한 밭을 모두 덮고 울창한 숲으로 만들어 갈 때는, 땅 속에서 고구마가 얼마나 자랐을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드디어 나의 궁금증을 해결할, 한 고랑을 6월부터 쭉 차지하고 있던 고구마밭을 드러낼 시간이 왔다.
싹 걷어낸 두둑은 처음 만들었을 때 그대로 부풀어 있었지만 어린 왕자의 보아뱀처럼 그 속엔 과연 어떤 모양과 크기의 고구마들을 품고 있을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정성스레 두둑을 쌓을 적 사용했던 같은 삽을 들고 이번에는 깊게 찔러 두둑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땅 속 어딘가에서 자랄 고구마가 상하지 않기 위해선 최대한 바깥 쪽에서 깊게 파내어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삽으로 흙을 들어 올릴 때 무언가가 느껴진다. '이곳에 고구마가 있다'. 그렇다면 이젠 그 주변을 넓게 깊게 찔러서 공략한다. 그러면 점차 모습을 고구마는 모습을 드러낸다. 땅 속에서 반긴 고구마의 첫인상은 ‘줄줄이 고구마’였다. 이론적으로는 들었어도 실제로 보니 신기하기만 했다.
고구마는 다른건 몰라도 수확이 어렵다. 참 많은 노동력을 요한다. 그래서 틈틈이 시간이 나면 밭에 가서 야금야금 캐기로 했다.
고작 한 고랑인데 몇 날 며칠이 걸렸다.
고구마를 캐는 것이 설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집 귀염둥이 막내 강아지 록키는 수확 내내 고구마 밭을 계속해서 서성였다. 평소 고구마말랭이 간식을 좋아하는 록키는 어디서 먹어본 냄새가 났는지 캐낸 고구마 중 먹기 좋은 크기를 골라 냉큼 물고 도망간 그 자리에서 바로 뜯어먹었다. 우리 가족 중 가장 먼저 고구마를 맛본 건 록키다. 냠냠 정신없이 먹는 모습을 보니 고구마 맛이 아주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구마를 캐내고 난 후엔 잘 말려야 한다. 그리고 바로 먹기보단 당도를 위해서는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우선 캐낸 고구마의 흙을 잘 털어낸다. 그리고 머리 부분의 줄기, 꼬리의 잔뿌리들을 잘라내는데 또 너무 바짝 정리하면 금방 상한다고 하니 최대한 주의하며 작업한다. 그리고 고구마 수확 후 실내로 옮겨 신문지를 깔고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잘 말려준다. 그리고 당도를 위해 상자 안에 신문지 위에 차곡차곡 너무 높지 않게 담아 보관하고 20일 정도 숙성한다. 그리고 맛있게 굽고 먹는다.
직접 길러 맛은 더 좋으니까, 록키가 좋아하니까 등 수확이 어려운 고구마여도 내년에 또다시 이 작물을 기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찾아낸다. 그렇게 몇 가지의 이유를 나열하고 난 후에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힘든 만큼 수확의 의미를 느끼기엔 참 좋은 작물 중 하나라는 것.
당근
- 심은 시기 : 7월 중순
- 수확 시기 : 10월 중순 (보통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
완전한 수확 전, 당근이 필요해서 혹은 궁금해서 몇 번 캐낸 적이 있다. 아직 덜 자란 느낌이라 최종 수확을 미루고 미뤘다. 또 당근은 추위에 강해 서둘러서 캐낼 필요가 없단다. 더 두려했으나 땅을 파내 수확하는 뿌리식물들은 땅이 얼기 시작하면 그 작업이 어렵다기에 지금이 적기다 생각했다. 고구마를 모두 캐낸 후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차근차근 당근을 수확했다.
당근도 고구마처럼 조심히 캐내야 한다. 얼마나 땅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렸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상처 나지 않게 깊게 땅을 삽으로 파내고 똑똑 빼내주면 된다. 그래도 고구마보다 쉬운 건 이파리가 땅위로 잔뜩 올라와있으니 위치를 알기 쉽다.
수확하면서 깨달은 건 당근을 키우는 초반, 모종이 땅에 적응하고 적당한 크기로 자랐을 때 솎아내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적당한 크기의 당근을 위해서는 땅속에서 자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데 솎아내지 않으면 공간이 부족해 충분하게 자라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근은 추위에 강하고 까다롭지 않아 보관하기에도 편하다. 5~6개월은 거뜬하다. 베란다나 냉장고에 신문지에 싸서 보관하면 끝이다.
직접 기른 당근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향이 강하고 참 달다. 식감도 더 좋고 색도 완전하게 예쁜 주황색이다. 보관성도 좋아서 주변분들께 '직접 기른 당근입니다'라는 멘트를 치며 선물하기에도 좋았다. 다음 해에도 밭 반칸정도를 차지할 작물 중 하나는 당근이 될 것 같다.
들깨
심을 마음이 없던 들깨였지만 옆집할머니께서 심으시고 남은 들깨를 몇 개 가져와 궁금한 마음을 품은 채로 밭 빈 곳에 심었다. 여름동안 풍성하게 깻잎을 달고선 꽃을 피웠고 고소한 향을 잔뜩 뿜더니 그러곤 잎이 노래지고 갈색으로 변하더니 어느샌가 바짝 말라버렸다. 보통은 미리 베어내고 말려 들깨를 털어내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던 나는 심어진 채로 말려 버렸다. 바짝 말라 꺾어내기 쉬울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다. 억새질만큼 억세 져서 질기기까지 하다. 만만하다 싶어 가위로 베려고 했으나 줄기가 생각보다 두꺼워서 택도 없었다. 보관되어 있던 낫은 오래돼서 잘 베어지지도 않아서 그냥 뿌리째 뽑아버렸다. 지나던 옆집할머니께서는 그렇게 뿌리째 뽑으면 나중에 털 때 흙 다 들어간다고 아쉬워하셨다.
어쩔 수 없이 경험한다 생각하고 무작정 털었다. 한창 유행하고 있던 농사 예능프로그램 <콩콩팥팥>에서 들깨를 터는 장면을 보았었고 따라 흉내를 내보기로 한다. 프로그램에서 처럼 또 옆집 할머니댁처럼 많은 양이 아니니 대충 털어내도 될 듯해서 마음이 편했다. 창고에서 찾아낸 깨끗한 비닐을 깔고 살살 털어냈다. 후두두둑 깨 떨어지는 소리가 비 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퍼지는 들깨향 그 자체가 힐링이다.
들기름은커녕 갈아도 얼마 되지 않는 양을 수확했지만 그 결과는 중요치 않았다. 들깨도 키워봤고 깨도 털어봤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다음 수확을 위한 관리
배추
한해 텃밭 농사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빅이벤트는 아마도 김장 작물을 기르고 수확하는 일일 것이다. 김치를 만드는 많은 작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배추는 속이 잘 차서 단단하고 달달하게 키워내는 것이 관건이다. 그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참 많은 정보를 책이며 동영상에서 찾아보고 습득했다. 어느 정도 배추가 컸다면 볏짚이나 끈으로 속이 차오를 수 있게 갑자기 찾아오는 한파에 냉해를 입지 않게 묶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찾아본 봐로는 그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볏짚이 없어서 집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분홍색 끈으로 퍼져있는 꽤 크기가 큰 배춧잎을 모아 살짝 묶어주었다. 이제는 묶인 배추의 안이 잘 차오를 수 있도록 간절히 바라는 일만 남았다.
빈 곳은 채울 수 있다
쪽파
채우기 위해선 비워야 한다. 적당한 때를 알고 자리를 비워준 고구마 자리에는 새로운 작물이 그 자리를 채웠다. 역시나 옆집할머니께서 이제는 이걸 심어야 할 때라며 건네주신 쪽마늘이다. 쪽마늘을 심으면 파김치에 쓰이는 쪽파가 자란다. 보통 김장을 위해서 조금 더 빨리 심지만 시기가 조금 늦었기에 내년 봄 수확을 목표로 심었다.
쪽파는 심기가 어렵지 않다. 구멍을 낸 후 한 두세 개 정도 쪽마늘을 심고 물 주면 끝이다.
심은지 열흘정도 지났을 때 확인해 보니 벌써 싹이 꽤 자랐다. 성장도 빠른데 1~2주만 일찍 심었어도 김장에 충분히 쓸 수 있었는데 아쉽다. 역시 농사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래도 겨울을 이겨낸 쪽파를 봄에 수확해 파김치를 해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군침이 돈다.
두 손의 손가락을 모두 펴거나 굽혀야 비로소 채울 수 있는 숫자 '10', 그 10월이 끝이 난다. 한 달 한 달이 지날수록 꽉 채워가던 밭이 10월이 되자 비워지고 있다. 한 해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텃밭의 현황을 통해 알아챌 수 있다는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귀하다.
불과 10개월 전 만해도 싹을 틔울 수는 있는 건지 수확이란 건 가능한 건지 의문으로 가득했다.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내가 농사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도 자연의 위대함을 매 순간 느낄 수 있다는 게 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남은 2개월 동안 텃밭은 나에게 어떤 것을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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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힙스터]
"태어난 곳은 시골, 내 꿈은 힙스터"
시골의 일상을 그리고 담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과 마음이 따르는 행복을 실천하는 진정한 힙스터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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