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이면 여자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무줄놀이에 열중했다. 놀잇감이 달리 없던 시절 낭랑한 노랫가락에 맞춰 양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폴짝폴짝 뛰는 고무줄놀이는 하는 아이도 보는 아이도 모두를 열광하게 하는 최고의 놀이였다. 그 열광의 틈을 비집고 희경이가 말을 걸어왔다.
“고무줄 니 가지라.”
최고의 놀이에는 늘 방해꾼들이 있었다. 동갑내기 남자아이 희경이는 당시 고무줄 끓기의 명수였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고무줄을 끓어 관심을 표현하는 남자아이들도 있었지만 희경이는 끓은 고무줄을 가져와 호감을 표현할 줄 아는 실속 있는 훼방꾼이었다.
나는 몇 번의 고무줄 선물을 완강하게 거부함으로써 나름 사회정의의 선을 지켰다. 50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희경이의 고무줄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처음 받은 프러포즈처럼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저 이번 주말에 안나씨 부모님 뵈러 가려고요.” 세 번째 만난 날, 남편은 이렇게 프러포즈의 운을 뗐다. 먼저 요기를 하자고도했다. 친구들과 저녁 약속을 했는데 늦어지면 너무 배가 고파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간단히 요기라도 하자'는 먹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친절이 발을 땅에 붙이고 사는 현실적인 사람으로 느껴져 싫지 않았다.
부모님 뵙고 결혼 허락을 받겠다는 말에 이어 “마음고생만은 시키지 않겠다”고도했다. 살아보니 ‘마음고생만은 시키지 않겠다’는 말은 ‘밥만큼은 굶기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던 거 같다. 너무 배고프지 않기 위해 요기를 먼저 할 만큼 삶의 기본을 중요시하는 남편이었기에 밥은 굶어도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기로 시간을 낭비했던 나는 무의식 속에서도 남편이 그런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직장생활 중에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봉급을 가져다준 남편은 프러포즈 때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상대를 대접하는 법이다. 우리 부부는 요즘 손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제2의 육아 담당자로서 손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를 쓴다.
손주와 친해지면 하고 싶은 각자의 꿈이 있다. 손주와 둘이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는 꿈을 꾸는 남편과 달리 나는 손주의 일기장을 보며 키득거리고 함께 어린이 도서관을 다니는 꿈을 꾼다.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손주 마음을 얻기 위한 꿈을 꾸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30년을 넘게 함께 살아왔지만 상대를 대접하는 방법에서는 그리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함께 살아오면서 내가 꿈꾸며 이루어냈던 것들은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50여 년 전 희경이의 고무줄은 당시 여자아이들에게는꼭 필요한 놀잇감이었기에 기억의 저편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을것이다. 남편의 ‘마음고생 안 시킨다’는 프러포즈 역시 삶의 기본을 중시해 주겠다는 약속이었기에 꿈을 향해 가는 최고의 긍정 에너지가 되었다.
오늘 남편은 나 없는 사이 배달 자장면을 손주에게 먹여봤다고 자랑했다. 자장면을 거부하지 않았던 손자와 조만간 중국집에서의 데이트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남편의 프러포즈는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거 같으면서도 상대에게 최적화된 형태로 모양새를 갖추어 나간다. 내가 아무리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운운하여도 손주와의 도서관 데이트는 남편보다 뒤처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손주와의 프러포즈 포트 폴리오를 수정했다. 인생의 기본을 중시하는 남편의 꿈에 나의 꿈을 덧 붙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우리 부부의 꿈을 윈윈 win win 시켜 주는 것이리라. 중국집에 가면 짬짜면이 있듯 우리 부부는 손주를 향한 프러포즈의 구성을 ‘도서관 후 중국집’으로 합의를 보았다. 정신적인 허기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 후 배부름을 만끽하는 것도 인생의 쓴맛 단맛을 고루 체험하며 삶을 배워가는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마음을 얻는 자가 세상을 얻는 것이리라. 지금 우리 부부는 우리를 향해 웃어주는 손주를 보며 ‘행복’이란 단어의 실체를 만난다.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대상이 있기에 기쁜 삶이라고 확신한다. 언젠가는 우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손주를 보게 될 것이다.
고무줄을 내미는 손을 보며 부끄럽지만 마음 한 편 자리했던 자랑스러움이나 성실한 월급이 주었던 삶의 안정감 모두 삶의 온도를 높여주는 것들이었다. 이제 도서관과 중국집에 함께 가는 꿈을 꾸며 손주가 주는 기쁨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가는 요즈음, 자장면과 책으로 손주에게 전할 프러포즈의 즐거움을 새삼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