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직장이 생겼다.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33년 만이다. 집에서 20분 정도 거리이니 제법 출퇴근 기분이 든다. 로드 매니저 남편까지 대동하고 출퇴근하는 기분이 회사 중역이나 된 듯 우쭐하기도 하다. 직장에는 직속 상사가 둘이다. 생후 18개월과 1달이 채 안된 두 손주다. 그렇다. 남편과 나의 직장은 딸네 집이다. 우리는 직장을 손주네 하우스라고 부른다. 우리 부부는 육아 도우미인 셈이다. 손주 둘의 심기를 살피는 것이 우리 부부의 중요한 직무이다. 남편이 입사 동기가 된 셈이니 일급 비서라도 있는 것처럼 든든하기까지 하다.
새 직장의 시작은 지난여름 걸려온 딸아이의 전화에서 시작됐다.
“엄마 나 다시 이사 갈까?”
친정과 떨어져 살며 첫아이 육아로 지쳐있던 딸이 둘째를 갖게 된 것이었다. 부모와 친구가 있는 친정 가까이로 오고 싶은 딸의 마음을 눈치챈 남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새 보금자리를 찾았다. 열흘 만에 딸의 집이 정리되고 더 빠르게 새 집이 마련됐다. 딸아이의 이사는 이렇게 급속히 이루어졌다. 가까운 곳으로 이사한 딸의 집을 틈틈이 들여다보다 둘째 손주가 태어나고는 우리 부부의 정식 출근지가 되었다.
오전 8시 출근, 저녁 6시 퇴근이다.
개인 산책시간과 재충전을 위한 휴식시간을 제하면 1일 법정 근무시간이 맞춰진다.
손주네 하우스 근처에는 새벽시장이 열리는 재래시장이 있다. 출근의 시작을 장보기로 연다. 장보기의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큰 손주의 먹거리다. 최고의 육아 파트너인 남편의 식성과 미역국에 물린 산모 딸아이의 먹거리도 구입 순위 2위이다. 이렇게 봇짐 싸듯 장바구니에 담긴 먹거리 재료들을 남편 손에 쥐여준다. 시끌벅적한 장구경이 우리 부부의 아침을 유쾌하게 열어준다.
손주네 하우스에 들어서면 지난 저녁 육아의 파편들이 전쟁의 상흔처럼 집안 가득하다. 딸은 사위가 출근하고 우리가 도착하기까지의 1시간 남짓한 시간을 두 손주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가 출근하기 전 큰 손주님은 벌써 아침밥을 먹은 상태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은 구경거리라는데 딸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 나 역시 딸의 밥을 차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내가 육아의 파편들을 치우는 동안 남편은 주방 그릇들을 정리한다. 우리 부부의 직무는 정확히 구분되어 있다. 나는 요리, 남편은 설거지다. 둘 다 맡은 직무에 전문가가 아니다. 남편이야말로 평생을 주방과는 무관하게 살아왔으니 “그릇을 깨끗이 헹구지 않아 주방세제로 배가 부르다”는 나의 잔소리로 이미 본인의 배도 부른 상태다. 내 코가 석자가 된 지금은 남편의 설거지는 황송할 뿐이다.
동생을 보게 된 큰 손주는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떨어져 있게 되었으니 큰 손주의 상심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동생을 보는 것이 조강지처가 첩을 보는 것과 같다는데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은 큰 손주는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하다. 나는 남편에게 큰 손주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직무를 100프로 완성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큰 손주의 등원은 늘 순탄치가 않다. 집을 떠나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게 큰 손주에게는 영원한 이별 인양 큰 사건이다. 등원 때마다 소리 높여 통곡하니 잦은 후두염으로 봄 학기 내내 소아과 병원이 1등 경유지가 되고 있다.
한 바탕 떠들썩한 큰 손주의 등원이 끝나면 작은 손주의 목욕시간이다. 팔꿈치로 물 온도를 맞춘 목욕물 두 통을 대령하는 남편, 이제 우리의 직속 상사는 둘째 손주님이시다.
둘째 손주는 매일 큰다. 오전과 오후가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발가벗겨진 채 우리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여 목욕물 속으로 들어오는 손주의 사랑스러움에 우리 부부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큰 손주의 귀가시간이 가까워진다. 어린이집에서는 누구보다 의젓하다는 손주는 식구들을 만나면 편치 않은 심신을 늘어난 짜증과 어리광으로 뿜어낸다. 하루 6시간 집을 떠나 있는 것에 대한 나름의 통과의례다 싶다. 지금은 큰 손주를 집안의 최고 어르신으로 모시고 있으니 “그래, 그랬구나, 그렇지”라는 긍정적인 반응, 아이 메시지로 큰 손주를 달랜다. 다행히 우선순위로 고른 먹거리들을 잘 먹어줘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답을 받는 듯하다.
하루 중 큰 손주가 돌아와 저녁을 먹이기까지의 시간이 육아의 하이라이트이다.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고 책 읽어주기, 간식 만들어 주기 등 다양한 육아의 세계를 경험한다.
요즘에는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손주의 예절교육에 특히 힘쓴다. 배꼽인사가 대표적이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나는 “안녕하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외치며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기를 가르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나의 배꼽인사를 받는 큰 손주는 직속상관임이 분명하다. 이 소란스러움에 하루 종일을 숙면하던 신생아 작은 손주도 슬그머니 눈을 뜨고 교육현장을 지켜본다.
큰 손주의 목욕이 끝나면 설거지를 말끔히 끝낸 남편이 앞치마를 푸른다. 우리의 퇴근시간이 가까워진 것이다. 때로 야근도 한다. 사위의 퇴근이 늦어지면 큰 손주의 잠자리 교육에도 참여한다. 그렇지만 정확히는 주 5일 근무다. 금요일이면 우리 부부는 불금의 즐거움도 체험한다. 토요일 늦잠을 잘 수 있으니 잠들기를 재촉할 필요가 없다. 이것저것 읽고 쓰고 여유를 만끽한다. 그러다 슬그머니 낮에 보고 온 두 손주의 동영상을 본다. 보고 또 봐도 언제나 재미있다. 남편과 웃고 이야기할 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근무지가 생긴 이후로 달력 속 빨간 날이 좋아졌다. 육아 파트너 남편도 더 든든해졌다. 더 이상 힘 빠지는 아침도 없다. 우리 부부의 지금 이 시간도 재테크 못지않은 소중한 추억 테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