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사라진 술 문화중 하나가 권주사일 것이다. 그날의 주인공이 술잔을 높이 들고 나름 위트 있는 한 마디로 좌중의 술맛을 돋우는 권주 사는 술자리의 감칠맛 역할을 한다.
남편의 술자리가 잦다 보니 술을 전혀 못하는 나도 술자리에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험상 술자리는 전반전만 흥미로웠다. 한 명 두 명 술이 거나해지면 맥락 없는 이야기들만 오고 갔다. 그래도 이야기가 오 갈 수 있는 상황은 그나마 젊잖은 편이었고 유머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사정은 낫지만 맨 정신으로 술에 푹 젖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이럴 때 “자! 잔 정리”하며 막잔을 들게 하여 술자리를 정리해 주는 사람이 가끔 있다. 나에게는 구세주이지만 애주가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인물일 것이다. 애주가들에게 정리가 어디 있겠는가? “딱! 딱! 각 맞추는 인생은 저리 가라”는 소신으로 모였을 술자리이거늘.
남편이 한 때 즐겨 사용하던 권 주사가 있었다. ‘소취 하즐, 당취 평즐’이다. 해석하자면 ‘소주에 취하면 하루가 즐겁고, 당신에게 취하면 평생이 즐겁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남편은 8글자의 짧은 권 주사를 본인이 외치면 좌중의 술친구들이 무려 25글자의 권주사 전문을 외치기를 원했다. 그것으로 이미 멘탈의 자유로움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였다.
맨 정신으로도 기억하기 어려운 장문의 권주사를 취중 친구들에게 요구하는 그 예의 없음을 몇 번이나 지적했지만 공개적으로 배우자에게 하는 최고의 아부를 포기하지 않기로 한 것인지 한 때 술자리에 동석할 때마다 그 긴 권주사를 각자 기분대로 외치는 불협화음을 매번 들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술잔 예찬론에 들어갔다. 얼음맥주를 콸콸 따른 차가운 술잔을 잡을 때마다 가슴이 짜릿하다고 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고도 했다. 3개월도 채 안 되는 연애기간이었지만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고백이었다. 그런데도 첫사랑에 빠진 설렘과도 같은 그 말이 듣기 싫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열렬하게 좋아한다는 그 에너지 안에 남편 다움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여러 모양의 술잔이 있다. 이 모양 저 모양의 여러 술잔을 섭렵하고 나서 남편이 선택한 술잔은 500cc 두꺼운 유리 술잔이다. 밥그릇엔 밥을 반만 담아 달라면서 맥주는 500cc 잔에 꽉꽉 눌러 따랐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술손님이 잦았던 때에는 500cc 술잔 몇 개만으로도 개수대가 꽉 차곤 했다. 그 무거운 컵에 가득 찬 맥주를 마시다 보면 남편 주장대로 손목운동이 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싶었다.
그러나 그 무거운 잔을 설거지하는 일은 손목운동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나이가 들수록 뭐든 무거운 것은 기피대상이 된다. 시집올 때 해온 3중 바닥 냄비도, 큰 맘먹고 산 무스탕 코트도, 유명 메이커 발목 등산화도 오래전 품을 떠나보냈다. 그런데도 500cc 맥주잔은 집안의 가보 인양 잘 보이는 곳에 늘 자리하고 있다.
언젠가 남편의 손목 힘이 줄어드는 날이 오면 이 잔과도 이별하게 될까? 남편의 가슴을 뛰게 하기도 했지만 지방간 수치도 올라가게 했을 500cc 술잔.
오늘은 실외 온도가 급상승했다. 6월의 초여름 더위가 남편 옆으로 바짝 다가온 날이다. 500cc 술잔을 냉동실에 넣었다. 그 컵에 얼음맥주를 콸콸 따라 마실 남편의 여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