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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Mar 05. 2022

도서관 후 자장면

“하부지, 하부지”

요즘 큰 손주가 부쩍 남편을 찾는다. 누구를 더 찾느냐가 손주가 우리에게 보내는 사랑의 질량이기에 ‘하무니’인 내가 살짝 밀리는 형국이다. 이유는 하나 ‘떴다 떴다 비행기’ 노래 때문이다.   

   

남편은 얼마 전부터 손주를 비행기 삼아 높이 들고 공중 날기를 시켜줬다. 자신의 나이를 잊고, 손주가 나날이 체중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잊고 힘을 쓴 남편에게 ‘떴다 떴다 비행기’의 여파는 즉시 찾아왔다. 비행기가 된 손주의 몸무게가 남편의 허리를 강타한 것이다. 한의원을 다니며 파스 냄새를 풍기는 남편을 보고 내가 나섰다. 다른 놀이가 필요했다.     


작년 손주의 여름 방학은 우리 부부에게 최선의 육아를 요구하던 때였다. 코로나로 언제 개학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손주와 시간을 보낼 다양한 놀이가 필요했다. 방학 첫날, 우리 부부는 오래 꿈꾸어 오던 손주와의 도서관 나들이를 시작했다.      


시립도서관 어린이실에는 유아 놀이실이 따로 있었다. 그 넓은 유아 놀이실이 코로나 여파로 텅텅 비어 있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 들어서자 손주는 분주해졌다. 손이 닫는 곳의 책을 한 권, 두 권 빼서 나에게 가져왔다. 책은 할머니 담당이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책을 펴고 한 줄 두 줄 읽어주는데 직원의 제지를 받았다.

“책은 바깥 열람실에서 조용히 읽어 주세요.”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그림을 보고 책장을 넘겨주는 것뿐이었다. 두 돌이 채 안 된 손주는 침묵 속에서 책을 보는 것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혼자 독차지한 넓은 놀이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부지런히 책을 꺼내 나에게 가져왔다. 우리 부부는 꺼내온 자리를 일일이 기억해서 책을 정리하는 게 처음 방문한 어린이 도서관에의 일이 되었다.      


책은 읽혀야 하는 사명보다 촉감 놀잇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유아실을 뛰어다니기를 30여분. 차라리 ‘떴다 떴다 비행기’가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들 즈음 우리는 5권의 책을 대출해서 도서관을 나왔다. 손주의 첫 대출이었다.     

        



육아 초기 손주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남편은 육아 로망으로 손주와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했다. 어린 시절 최고의 음식이 자장면이었던 남편이 손주에게 주는 최고의 마음 표현이었다. 나 역시 육아 로망이 있었는데 손주와 함께 도서관에서 책 읽고 독후감상 나누는 거였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 있었던 50권짜리 어린이 전집을 부러워했던 나의 독서 욕구를 손주에게 채워 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립도서관의 어린이 책 열람실을 들어가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 책을 대출하고는 두 주에 한번 5권의 유아용 책을 대출해서 집에서 읽어 주며 내 소박한 육아 로망을 대신하고 있었다.     


봄 방학을 맞아 며칠 전 어린이 도서관을 재차 방문했다. 6개월 전, 책을 놀잇감 삼아 빼놓기만 했던 손주는 이번엔 제법 책을 꺼내 책장을 넘기며 보았다. 방문객이 우리가 전부였던 어린이 도서관에서는 손주가 노래를 불러도 내가 책을 읽어 주어도 제지하지 않았다. 코로나로 찾아오는 유아가 적으니 자주 오라는 격려의 말도 했다.      


남편은 손주의 이름으로 된 도서 대출증을 만들었다. 세 살짜리 손주의 도서 대출증이 마치 큰 상장이라도 되는 듯 든든하게 느껴졌다. 손주는 책을 빌려가자는 말에 내가 골라 놓은 책을 마다하고 좋아하는 캐릭터의 그림책을 골랐다. 본인 취향의 그림책을 고를 줄 아는 손주의 성장이 반갑게 느껴졌다. 몇 년 되지 않아 삐뚤빼뚤 몇 글자의 독후감도 끄적일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을 나와 근처 자장면집에 갔다. 이른 시간에 역시 우리가 손님의 전부인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남편과 나의 육아 로망이 함께 이루어진 날이다. 입에 까만 자장을 묻힌 손주에게도 기억될만한 날이었을 것이다.     


어린이 도서관을 다녀온 후 연년생 두 아들을 키우느라 쩔쩔매는 딸에게 힘주어 말했다.      

“책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면 걱정할 게 없어. ‘혼자 놀기’의 정수에 독서만 한 것이 어디 있으려고”    

 

남편도 한 마디 했다. 

“다음엔 도서관 갔다가 짬뽕을 먹을까?”     

다음 우리 부부의 합작 육아는 도서관 후 짬뽕이다.


그다음은 ‘도서관 후 피자’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6개월 전엔 책을 빼놓기만 했던 손주가 이제는 제법 책을 골라서 혼자 볼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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