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 화물로 부쳐 온 아이스박스에서는 올망졸망한 반찬 봉지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내가 음식에 소질 없음을 아는 B가 얼마나 나를 배려했는지는 반찬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반찬 봉지마다 자세한 메모를 달아 생전 처음 맛보는 이국적인 요리들의 이해를 도왔다.
쉬는 일요일 하루 종일을 종종거리며 만들었을 반찬이 월요일 이른 시간에 고속화물로 왔다. 나를 위해 내어 준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B가 반찬을 보낸 때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딸아이가 집 근처로 이사와 딸의 살림을 돕던 때였다. 내 집 살림도 허덕거리던 차에 딸의 살림도 돕느라 동분서주하던 내게 B의 밑반찬은 가뭄에 단비나 진배없었다. 오후 한 나절을 우리 집에서 보내던 손주가 반찬 봉지를 먼저 반겼다. B의 밑반찬은 남편과 딸, 손주까지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주었다.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는 B, 나와는 신학원 동기로 신학원을 함께 다니던 2년 동안 언니 같고 엄마 같은 친구였다. 1시간 거리에 있는 신학원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서는 길은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듯 매번 분주했다. 화장품을 제대로 펴 바르지도 못하고 급하게 나선 길, 약속 장소인 근처 체육관에 가까워지면 앞에 보이는 B의 차를 보고 안도의 숨을 쉬곤 했다.
B의 집은 전원주택이었다. 도심과 시골의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소도시에서 20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에 살던 나는 B의 전원주택이 몹시 부러웠다. 특히 주방 뒷문으로 나간 B가 텃밭에서 오이며 가지, 고추 상추 등을 한 바구니 담아 들어올 때는 원색의 야채들과 B의 후덕한 손의 조합이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가 없었다.
B는 뚝딱뚝딱 요리를 잘했다. 6월이면 큰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서 만든 딸기잼을 한 병 가득 담아 주었고 여름이 끝나가는 때엔 여린 고춧잎을 잔뜩 삶아 먹기 좋게 소분해 주기도 했다. B의 텃밭에서 땅에 닿아 휘어진 오이 몇 개와 잘 익어 껍질이 터진 토마토를 직접 딸 때는 마치 농부라도 된 듯 수확의 기쁨이 느껴졌다.
신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앞 창문으로 지는 해와 마주쳤다. 40대의 아직은 창창했던 그때, 지는 해를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성경 묵상 글을 써야 하는 과제에 대해 서로 주고받았던 신앙의 정서들은 당시 정신을 살찌우는 양분이었다.
요리 솜씨 좋던 B는 서울로 이사해 식당을 냈다. 마냥 후덕하기만 한 B가 이익을 내야 하는 요리가 적성에 맞을까 싶었는데 오래지 않아 식당을 정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혹 연락이 되긴 했지만 삶의 반경이 달라지니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B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여전히 나에게는 언니며 친구로 남아 있다. 번번이 받기만 하는 나는 혹시라도 전생에 내가 B의 언니라도 돼서 다정하게 대해주었었기를 희망할 뿐이다. 아마도 나눔은 태고적부터 이렇게 나눔의 크기가 큰 사람을 통해 전해져 왔을 것이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듯 사람의 호의도 선순환의 자정작용이 될 수 있다는확신이 든다
가끔 성경을 펼칠 일이 있으면, B가 선물한 성경 한 구석에 적혀 있는 B의 멋진 글씨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