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아파트 계단 오르기다. 내 건강도 건강이지만, 집에 콕 박혀 나가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을 문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계단 오르기의 운동효과는 설명이 필요 없다. 큰 욕심 없이, 10층 아파트를 아침마다 두 차례 정도 오르면(내려갈 땐 엘리베이터로) 아침 몸풀기로 딱 적당하다. 야심 차게 시작했는데, 첫째 둘째는 일찌감치 나가떨어지고 나마저 연말 긴 연휴 불규칙적인 생활로 인해 시들해지던 차였다. 이 와중에도 변함없는 건 8살 막내다. 아침마다 나를 흔들어 깨운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알람시계다.
"서울 갈라믄 장사 하루 문 닫아야 하는데"
아버지는 썩 내켜하진 않으셨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2012년 여름, 아파트를 팔고 잔금을 받기로한 날, 매수인은 내 아버지가 있어야 잔금을 치를 수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차익 짭짤한 매도였다면 아버지 아니라 일가친척을 부른대도 대수겠냐마는, 본전치기에 이런 조건이 달가울 리 없다.
2006년에 결혼한 아내와 나는 구로동에 있는 보증금 3천 월세 30만원의 원룸에다 신혼집을 차렸다.3천만원은 결혼 전 각자 직장 월급을 모아 마련한 종잣돈이었다. 여기서 첫 딸을 낳아 3명이 오손도손 지냈다. 좁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문제는 소음이었다. 얄디얇은 벽장 넘어 아이 울음이 새어 나갈까 애태우던 밤들이선명하다.둘째가 태어나자좀 더 집다운 집이 필요했다. 보증금에 대출받은 7천만원을 합쳐 전세 1억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외벽 페인트가 흘러내릴 정도로 낡긴 했지만 방 2개짜리에 번듯한 놀이터도 있는 단지 아파트였다.
몇 년 후 운 좋게 회사 유학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온 가족이 해외로 떠나게 되었다. 1억 전세를 끼고 인근 초소형 아파트를 2억에 매입했다. 첫 재테크였다. 물론 내 지분은 여전히 3천만 원뿐이고, 1억 7천은 세입자와 은행의 돈이었다. 이런 걸 서민형 갭투자라고 부른다. 유학에서 돌아오면 불어난 자산이 반겨주리라 믿었다. 투자는 실패였다. 2년이 지나도 집값은 조금도 오르지 않았다. 귀국할 시기가 다가오자 조바심이 났다. 집을 처분해 현금화해야 세종시에 분양받은 아파트 계약금을 낼 수 있었다. 계약금 2천만원 못 내서 분양권을 날리나 싶겠지만 당시 내 사정이 딱 그랬다. 다행히, 늦지 않게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2년이라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손해보는 거래였지만 어쨌든 그는 구세주였다. 외국에 있는 나를 대신해 아버지가, 미리 써둔 위임장을 갖고 서울에 올라가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문제는 잔금날이었다. 내가 이미귀국한 터라 직접 매수인을 만나 잔금을 받고 서류를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매수인 쪽에서 내 아버지가 직접 오지 않으면 잔금을 치를 수 없다고 했다. 소유주가 있는데 지방에 있는 아버지를 왜 또 불러야 하냐고 따져도 소용이 없었다. 매수인이 좀 고지식하고 강경하니 웬만하면 원하는 대로 해주자고 부동산에서 중재했다.
잔금일, 이른 아침 KTX를 타고 오신 아버지를 모시고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갔다. 매수인 측에서 60대 부부와 젊은 남녀가 와 있었다. 젊은이들은 딸과 예비사위였다. 알고 보니, 부모가 결혼하는 딸 부부 명의로 집을 사주러 온 것이었다. 딸과 사위는 아무런 말 없이 중개사가 시키는 대로 서류 이곳저곳에 도장만 찍고 있었고, 돈 관계는 그쪽의 아버지가 전담했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이 거래의 돈줄인 상대방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를 아파트 실소유주로 생각했던 것이다. 계약일에도 아버지가 와서 서명을 했으니 그럴만했다. 내 명의인 것에 상관없이 실소유주인 아버지를 앉히고 잔금을 치러야 안심이 된다는 얘기였다. 매수인의 상식에선 이 아파트가 내 것일 리가 없었다. 젊은 사람이 월급을 모아 서울에 집을 샀다고? 난 억울했다. 대학등록금이든 결혼식 비용이든 신혼집 보증금이든 단 한 푼도 누구에게 의지한 적 없는데, 딸 결혼한다고 집해주는 다른 부모한테 그런 오해를 받는 건 좀 부당한 일 아닌가. 모든 자녀들이 그렇게 부모 덕보며 사는 건 아니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매수인들과 굳이 오해를 풀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아버지는 애써 해명을 했다.
"내는 한 푼도 보탠 거 없다 아입니꺼. 지들 월급 받아가 내 용돈도 주고 아파트도 사고 다 한깁니다"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는 아버지 앞에서 매수인은 듣는 둥 마는 둥 무관심한 수사관처럼 집문서만 살필 뿐이었다.
일이 끝나고 부동산 사무소를 나왔다. 열차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아버지께 식사하고 천천히 내려가시라고 했지만 늦게라도 가게 문을 열어야 한다며 서두르셨다. 택시보단 전철이 빠를 것 같았다. 아버지와 나는 구로디지털단지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육십 미터쯤 달렸을까, 거의 다 와서 전철역사로 통하는 육교 위에 올라섰는데, 아버지가 저 아래 육교 계단 중간쯤에 멈춰서 있다. 한 손은 계단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무릎을 쓰다듬으며 숨을 헐떡이신다. 아버지가 숨차 헐떡이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낯설었다.
"늙어서 네 고생은 안 시킬기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피식 웃곤 했다.
일찍 돌아가시길 바랄 리 없지만, 조금만 아픈 데가 있어도 유난을 떠시며 온갖 민간요법을 동원하시던 아버지의 행동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은 말씀이었다. 홀로 사셨던 아버지는 그로부터 2년 반 후에 조용히 세상을 뜨셨다. 오늘처럼 간밤에 눈이 펄펄 쏟아진 날이었다. 그렇게 일찍 가실 줄은 정말 몰랐다.
생전에 아들로서 후회되는 일은 셀 수 없지만, 아직도 그 여름 계단 난간에 의지해 숨을 헐떡이시며 날 올려다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박제되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잔금날 먼길 오가며 고생시켜드린 것 때문만은 아니다. 자식 결혼 선물로 집 한 채를 떡 안기는 매수인의 모습 앞에서 같은 아버지로서 얼마나 속상하고아들한테 미안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못난 자식은 그것도 모르고 내가 벌어 내가 산 집을 부모한테 동냥받은 취급당했다고 억울해했으니. 그냥 아버지가 실소유주 인척 하고 넘어갔어도 좋았을걸, 어차피 스치고 지나갈 사람들 앞에서. 못내 후회스럽다.
"아빠, 기다려. 좀 천천히 가"
투덜대며 뒤따라 오는 아들을 재촉하며 부지런히 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짧은 다리로 오르는 계단이 꽤 버거워 보인다. 아침마다 어김없이 깨워대는 건 너 아니니, 웬 사서 고생? 그래도 점점 나아져간다. 걸음도 호흡도 시작할 때보단 많이 안정적이다. 저 얇은 허벅지와 종아리에 살과 근육이 붙어가겠지. 그러다가 도둑처럼 올 것이다. 역전의 순간이. 난간을 붙잡고 숨을 헐떡대는 나와, 그런 나를 계단 위에서 여유롭게 내려다볼 네가 마주할 그날. 그러니 지금 내가 좀 앞서 가더라도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말거라. 내일의 승자는 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