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외노자입니다.
열세번째 인터뷰이는 인터뷰어 김비실의 친구이자 만리타향 프랑스에서 인터뷰를 진행해주신 요요 님입니다!
목차
1. 인물소개
2. 오늘 여기의 나 - 지금 하고 있는 일
3. 어쩌다 통번역가
4. 프랑스에서의 삶
5. 삶에 대한 평가
6. 후회하는 일과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
7. 기타 질문
8.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9. 마침
이름 : 요요
나이 : 33세
성별 : 남성
학력 : 불어불문학 학사 / 사회학 석사
경제력 : 집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고, 장볼 때 특가상품에 목숨 걸지 않을 정도.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요요입니다.
91년생이고, 한국에서 불어불문과를 전공한 후 프랑스로 넘어와 사회학 석사를 전공했습니다.
사회학 분화가 매우 세분화되어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저는 그 중에서 젠더와 정치학,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중점을 둔 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현재는 파리에서 통역 및 번역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통번역을 하거나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교류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통번역가로서의 경제력, 어느 정도인가요?)
지금의 경제력을 묻는다면 월급 받으면서 집세 내고, 생활비 내고, 장볼 때 PB상품이나 특가상품에 목숨 걸지 않고, 저금도 하고, 남은 돈으로 한달에 한 번쯤은 지름신도 강림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다만 이렇게 된 지는 얼마 안 됐고요, 학업을 마무리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매우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통번역 일이 어떤 분야를 정해놓고 하는 게 아니다 보니 매번 다른 분야에서, 다른 사람과 일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건설현장에 가서 현장직원분과 관리자 사이에서 지시사항 통역을 하기도 하고, 중요한 사람이 왔을 때 의전을 할 수도 있고, 웹툰 번역 이런 걸 할 수도 있어요. 또 한국 게임을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해 현지화 작업도 할 수 있죠.
(일하면서 다루는 분야가 매번 달라진다는 거군요.)
제가 대학에서 불어불문을 전공했습니다. 3학년 때 교수님께서 이공계 교수님을 소개시켜 주셨어요. 그분이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에서 태양열 발전판 관련되어 사람이 오는데 통역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제가 추천을 받은 거였어요. 얼떨결에 하게 됐는데 너무 흥미로웠어요.
(이미 상당히 불어를 잘하셨던 걸로 아는데, 통역일은 많이 달랐나요?)
언어를 한다고는 하지만 중간에서 통역을 하는 건 새로웠어요.
지켜야 하는 예의도 있고 권장되는 태도도 있고. 그런데 돈을 준다니까 무작정 가서 우당탕탕 하고 그랬죠.
당시 일이 일주일 정도 답사도 하고 그 답사하는데 따라가서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지냈어야 했는데, 지나고 나니까 되게 보람차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전에도 어떤 프랑스 작가의 글 쓰는 일을 도와준 적이 있지만 정말 본격적인 일을 한 것은 이 아프리카의 일이 처음이었어요.
그 뒤로도 프랑스어 관련해서 계속 일을 했어요. 프랑스어 과외도 하고, 문화원 같은데서 일한 적도 있고. 근데 결국 다 프랑스와 한국 사이의 교류와 관련된 일이었죠.
프랑스에는 정부 인정 번역가 이런 게 있긴 한데, 그런 건 공식 문석 번역하는 쪽이에요.
제가 생각했을 때 사실 통번역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물론 통번역 대학원을 다닌다면 시작이 편할 수는 있죠.
저 같은 경우는 ‘와서 해볼래?’ 하면서 시작하게 된 거라, 통번역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학력보다는 어학 실력과 넓은 지식인 것 같아요. 어떤 분야에서 일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뉴스도 많이 봐야 하고요.
제가 [인터뷰 당일 기준] 다음주에 자동차 관련된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사실 저는 자동차에 대해 전혀 모르거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통번역가가 되고 싶다면 잡지도 보고 뉴스도 보고 하면서 자기만의 문화적인 배경지식을 넓히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스로 굉장히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적으로는 항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도 그게 싫지 않더라고요.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항상 다른 스토리를 듣게 되는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로워요.
타인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다면, 아니, 그냥 호기심이 많으시다면 통번역이 굉장히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통역은 어느 수준에 올라가기 전까지 다치는 과정이 필요한 거 같아요. 실수와 실패에 의연해지는 것도 경험으로 빚어지기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자신을 던지라고 조언 드리고 싶습니다.
네. 처음 할 때 주저하지 말고 적극성을 가지고 하면 좋다!
대학을 졸업한 뒤 장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뭘 해야 할까. 그러다 프랑스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어요. 거기서 사회학을 공부하게 됐고, 그게 이어져서 완전히 정착하게 됐습니다.
(사회학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나요?)
아뇨. 제가 파리에 교환학생 갔을 때 처음으로 사회과학 수업을 듣게 됐어요. 거기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교환학생으로 가서 처음으로 사회학 수업을 들어갔는데 수업 주제가 ‘일탈의 사회학’이었어요. 일탈 중에도 여러 주제가 있지만, 수업에서 제시된 건 첫째가 대마초 흡연, 두 번째가 거식증, 세 번째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첫 번째인 대마초 흡연. 이거 사실 한국에서는 불법이잖아요. 속인주의 때문에 해외에서 피워도 처벌이 되고. 물론 프랑스도 법적으로는 대마초 흡연이 불법이에요. 하지만 할 사람들은 다 입방귀 뀌면서 피우거든요.
이걸[대마초 흡연이든 약물이든] 사회문제로 볼 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강사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건 참여관찰 방법이었어요.
※ 참여관찰법 : 연구자가 연구 대상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직접 관찰, 자료를 수집하는 현지조사 방법(사회과학의 연구 방법 중 하나이다.)
강사님이 학생들에게 세네 명으로 그룹을 지어서 대마초 흡연 집단에 다가가서 뭐든 알아서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배운 사회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마음대로 뭐든 연구를 해봐라.
저는 그걸 듣고 너무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일단 대마초 흡연을 다루는 방법은 각 사회마다 다르잖아요. 한국처럼 강력처벌 할 수도 있고, 미국 어느 주처럼 풀어놓고 양지로 끌어올려서 관리하는 것도 있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많은 곳에서 터부시 되는 주제를 가지고 대학교 1학년 새내기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해보라면서 수업을 진행하는데,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뿐 아니라 전체적인 수업 분위기도 달랐어요. 한국 같은 경우 교수님이 강의 중이실 때 손들 어서 ‘그거 아닌 거 같은데요?’ 이럴 수도 없고, 눈치 보면서 학점 잘 받으려고 하는데, 여기는 서로 질문하고 논쟁하고 왔다갔다 하면서 인터렉션이 되는 환경이었어요.
그때 사회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귀국을 했고, 졸업 후에 뭘 할까 고민을 이어가다가 사회학 공부를 해보고 싶다 생각이 들어서 사회학 석사 지원을 해서 프랑스로 오게 됐죠.
물론 지금 저는 석사 때 공부했던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살고 있지만, 그 과정들이 저에게 정말 큰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DALF C2[가장 높은 단계의 프랑스어 자격시험]를 땄음에도 외국인 입장에서 아카데믹한 환경에서 사회학 고등교육을 받고, 공부를 하고, 논문 쓰는 게 정말 너무 어려웠어요. 논문도 진짜 피똥싸면서 했는데.
사실 사회학이 제가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관심 가진지 2년도 안 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내가 잘 모르던 영역에 대해 내가 꾸준히 공부를 하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제가 정말 많이 성장하게 된 것 같아요. 또 이 공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볼 때의 내 태도도 변한 것이 스스로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말하고 싶은 게 뭐냐면, 사회학관련 통역을 할 일은 없지만 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는 거예요.
이전까지 내가 견고하게 가지고 있던 태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어쨌든 프랑스 사회에 정착한 이방인으로서, 프랑스에 사는 프랑스인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회와 세상을 볼 수 있는 시선이랄까.
넓게 보면 지금 [통역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나만의 사회학적인 연구를 하는 기분이에요.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 건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가는 느낌?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그럴 수 있는 소양이 생겼다.
그리고 통역 자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때 그때 던져진 일들에 대해 맞춰갈 수 있는 순발력과 적응력을 기르는데 외국어로 석사과정을 거치고 논문을 쓰고 했던 게 도움이 됐다고 봐요.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 대한 환상은 이제 없나 봐요.)
저도 프랑스에 오기 전에는 미디어로만 보면서 프랑스에 대해 되게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처음 왔을 때 그 환상 덕분에 되게 행복했어요.
그때 저는 프랑스어 듣는 거 자체가 너무 재미 있었어요. 빵집에 갔는데 직원이 ‘뭐 드릴까요?’ 이 말을 프랑스어로 하는 것도 너무 신기하고, 제가 ‘바게뜨 하나 주세요.’ 이러면 사람들이 알아듣는 것도 너무 신기했어요.
처음 왔을 때 어느 정도였냐면 메트로를 타면 안내방송이 나오잖아요. 저는 안내 방송으로 지하철 역 이름을 말하는 걸 듣는 것도 좋았어요. 그래서 처음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왔을 때는 아예 이어폰을 안 끼고 다녔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도 듣고 싶어서.
처음 와서 했던 게 유명한 맛집 가서 무슨 스테이크 먹기 그런거였고, 저는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여기 정착을 하고, 시간이 흐르고, 삶의 루틴이 생기면서 환상이 없어지고 그저 삶의 장소가 되었죠.
(더는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한 장면이 되었군요.)
제가 직장으로 출근할 때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에펠탑이 보여요. 파리에 온 관광객들이 황홀감에 찬 눈으로 그걸 바라보는데, 그들을 보면 저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도시, 이 나라에 대한 환상이 있던 때로.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죠.
그래서 저는 그들이 부럽고,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환상이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환상을 품고 관광객으로 오는 친구나 지인들에게는 이곳에 있는 여러가지 위험한 일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고는 해요. 뭘 피해야 하는지, 뭘 하면 안 되는지. 그건 여기 살고 있는 저는 알고 있는 거니까. 파리에 여행 온 사람들이 좋은 추억을 가지고 돌아갔으면 하거든요.
물론 인종차별이란 건 어디든지 있죠.
근데 차이점이라면, 한국에선 인종차별이 은근한 느낌이거든요. 물론 소수는 대놓고 나쁜 말을 하지만 가시적으로 인종차별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의 비율은 여기 프랑스가 훨씬 높아요. 길을 걷다 보면 ‘너네 나라로 가라.’, ‘칭챙총!’, ‘너 고양이 먹냐!’, ‘너 북한에서 왔냐!’ 이런 소리를 듣는 경우가 되게 잦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대응하시나요?)
인종차별 자체에 대한 생각은 많지만, 미시적으로 내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뭘 할 수 있느냐? 이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흘리고 지나치고. 그날 컨디션 좋으면 받아 치는 정도.
그리고 프랑스는 실제로 미친 짓, 예를 들어 칼부림이나 지하철에 똥을 싼다든가 하는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이 높으니까요. 일반적으로는 피하려고 해요.
또 외국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은 잘 넘길 수 있는 정도로 적응이 됐어요.
(이미 적응이 돼서 한국에서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에 이른 거군요.)
음……. 제 상황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글쎄요. 아직 평가를 한다, 이런 건 어려운 거 같아요.
그냥 나쁘지 않다. 이 정도.
그래도 어느 정도 경제적 수입이 있고, 잘 곳 있고, 안 좋은 일 있으면 만나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러면 됐다. 내가 프랑스에 있든 한국에 있든 그 정도 최소한이 있으면 이만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좋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정도예요.
저는 사람들의 평가에 극도로 예민한 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눈치도 많이 보고 남들 평가에 예민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 주어지면, 내가 잘 하고 있는 게 맞는지 계속 고민하는데 시간을 엄청 많이 써요. 속으로 계획하고 수만가지 생각만 하다 아예 시작을 못하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했을 때 일이 잘 될까? 시작도 전에 많은 마인드맵을 만들고, 그러니까 느릿느릿하죠.
그렇다고 해서 계획적이진 않아요.
(평가 받는 것이 많이 두려운가 봐요.)
네. 남들 평가에 예민해요. 제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남들의 부정적 평가를 피하기 위해서 계속노력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남들의 평가에 예민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생 때 계기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대학에 늦게 입학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집이 갑자기 어려워졌어요. 그때는 아직 국가장학금 제도가 없을 때였어서 등록금을 구할 길이 없었고, 결국 대학을 못갔어요.
(아쉬움이 많이 남았겠어요.)
네. 그래서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학원 조교로 일하고 군대도 다녀온 뒤에 다시 입시를 준비했어요. 입시 준비를 하면서 언어교환 사이트에서 영어 회화를 배우고 있었는데 거기서 당시 동네에서 프랑스어 강사로 일하던 친구[지금은 프로 유도선수로 활동 중인 사람이라고…!]와 친해지면서 프랑스어를 배우게 됐어요. 결국 대학 입시 전에 DELF B2 자격증을 따게 됐어요.
B2가 있으면 대학의 어학특기자로 지원할 수 있었고, 제가 입학하던 해에 국가장학금 제도가 생겨서 등록금에 대한 부담을 덜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입학 후에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어떤 문제였나요?)
사실 문제라기보단 제 내면의 고민이었는데.
제가 늦게 대학에 들어갔으니까요. 동기들과 4~5살 정도 차이가 나잖아요. 사실 이제 와서 보면 나이 차가 뭐가 대수인가 싶은데, 그때는 위기의식도 있었고 그에 대한 자의식이 심했어요.
그리고 국가장학금을 받았지만 결국 갚아야 할 대출금이잖아요.
저는 이런 생각 때문에 빨리 졸업하자 생각하고 들어가자마자 3학년 수업을 들었어요.
(1학년 때 3학년 수업을 들었군요.)
네. 근데 거기서 안 좋은 말을 많이 들었어요. 약간… 쟤는 재수 없다. 이런 식의 말들?
안 그래도 저는 나이나 현 상황에 대한 자의식이 있는데 그런 말들을 듣게 되니까 타인들의 시선에 대해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교환학생도 2학년 1학기 때 도망치듯 가고, 돌아와서는 어떻게 해서든 조기졸업 해보려고 학점도 몰아서 듣고.
(안 그래도 낮은 자존감과 불안감이 있는 상황에서 좋지 않은 말을 듣은 경험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하는데 영향을 끼친 거군요.)
저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항상 있었는데 그런 상황들이 오니까 스스로에 대해 자꾸 검열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뭐랄까,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게 어려워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 상상하는 것도 힘들고 사람들이 막연히 나를 좋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네. 근데 프랑스에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한국에 비하면 좀 더 적은 거 같아서 조금은 나은 것 같아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특히 지금 나이에 만나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만의 삶을 바탕으로 자기 인생 철학을 쌓아 올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딱히 변할 것 같지도 않아요.
저를 어떻게 평가한다면 그냥 ‘그러시구나…….’ 정도.
그리고 파리 오시면 환영합니다.
저는 주변에 돌아다니면서 새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애완동물 기르고 도심이랑 좀 떨어진 곳에 정착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미래에 대한 이미지 외에 다른 개인적인 계획 같은 것도 있을까요?)
사실 중학생 고등학생 때는 문예창작과를 가고 싶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소설이 될 수도 있고 수필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지금 어쨌든 내가 차별화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은 프랑스에서 한국인으로 살면서 느낀 점이나 아직 풀어내지 못한 경험이니까 그런 걸 활용해서 창작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내가 겪은 걸 바탕으로 한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창작물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것.
특히 대학교 때 경주마처럼 살았어요. 한국에서 대학생일 때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은데, 그걸 후루룩 넘어가버린 게 아쉬워요.
인생 전반으로 보면 모든 선택에 대해 내 자의식 때문에 주저한 순간이 많았다는 거.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주저하다가 결국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후회해요. 해보지 못한 것들은 그결과조차 알지 못하니까.
프랑스 어휘에는 후회를 2가지로 표현해요.
‘regret’는 했던 것에 대한 후회, ‘remord’는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거든요.
제가 하는 후회는 ‘remord’에 가까워요.
나는 못할 거야. 나는 이런 상황에 있어서 할 수가 없어.
이런 생각들 속에서 흘려보냈던 것들에 대한 ‘remord’가 남아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했던 행동들, 그리고 내가 하기로 결심하고 했던 행동들.
예를 들어 프랑스로 오자고 결심했던 것이요.
그 뒤에는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경제적 상황도 있고.
그럼에도 어쨌든 결정을 해서 석사를 하고 여기 정착을 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 모든 선택에 대해 잘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프랑스 공부 자체를 안 했다면 [ 오늘, 여기 ] 인터뷰도 하지 못했을 거고, 김비실 작가를 만나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부끄러워진 인터뷰어 김비실이었다.]
이미 결혼을 했습니다.
(첫 번째 기혼자 인터뷰이였군요!)
아직 가족계획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눈치를 보는 사회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회 안에 암묵적으로 상정한 삶의 수준이 있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낙오자라고 낙인 찍히는분위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삶의 수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고, 그러다 보니 아예 시작조차 힘들어 하는 것 같달까요.
마치 수많은 고민을 거듭하던 저처럼요.
결국 결혼이나 출산이라는 그 관념 자체 질려버린 거 아닐까. 수많은 혐오담론에 휩쓸리기 쉬워진 것이나 그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은 현상도 그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눈치 보는 문화가 기저에 자리를 잡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회가 정해 놓은 암묵적인 수준을 너무 많이 생각하고, 거기에 대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이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는 거군요.)
우리 세대를 응원하고 다독이는 김비실 작가의 오늘은, 여기 프로젝트를 적극 추천합니다!!
(메르시 보꾸입니다.)
기본 질문지를 받고 질문에 대해 생각을 했었는데, 이야기를 하면서 훨씬 더 내 자신의 내면을 구체화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특히 저는 제 후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때그때 후회하기만 했지.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나의 과거에 대해 돌아보고 앞으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 오늘은, 여기 ] 프로젝트 소개 및 전체 인터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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