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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그리고 새해

250103금 러닝

by 우보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1904년 러일전쟁 中 쓰시마 해전 승리 후


이순신은 임진왜란 후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의해 전설로 일본에서 추앙되었습니다. 조선의 부활을 위해 쓴 징비록이 조선에선 금서처럼 읽히지 않는 반면, 일본에서 널리 알려지고 읽혔습니다. 조선 말기에는 일본어로 번역된 징비록이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읽혔다고 합니다.

선조는 이순신 뿐만 아니라 많은 의병장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이후 심화되는 조선사회의 죽고 죽이는 정치다툼에 큰 일조를 했으리라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유교적 명분을 인정받은 노론 세력들이 대부분의 친일파가 되어 나라를 팔아 먹는데 일조합니다.


어쩌면 이미 조선 후기부터 '나라'라는 관념은 그들에게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보단 '집안'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선조부터 시작된 방계 출신의 왕은 그런 자신들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데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그 지위에 있는가를 잘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세상사가 그렇듯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고 싶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법입니다.


징비록에서 읽어 볼 만한 내용을 추려보았습니다. 짧게나마 같이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숙종 때 이민서는 이순신이 일부러 죽을 장소를 노량으로 정하고 갑옷을 벗고 적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며 자살설을 제기했다. 이민서에 따르면 의병장 김덕령의 억울한 옥사 이후 곽재우 같은 의병장도 은둔할 곳을 찾아야 했으니, 이순신 역시 자신의 운명을 알고 미리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순신의 죽음과 관련해 자살설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징비록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우리 수군의 완패를 초래하였음에도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일등 공신에 책봉된 반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같은 의병장들이 선무공신에 선정되지 못한 점은 선무공신의 선정 과정에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그중에서도 김덕령 같은 의병장은 선무공신에 선정되기는커녕역모죄로 몰려 고문을 받다가 죽기까지 했다.

선조는 전란 초기 호남 지역의 전투에서 가장 뚜렷한 전공을 세운 의병장 김덕령을 1596년선조29에 발생한 이몽학의 난에 연루시켰다. 김덕령은 국문 중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등 고초를 당했고, 끝내 고문으로 죽고 말았다. 김덕령은 모친상 중이던 1593년, 담양에서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하니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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