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 다녀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큰 아이의 치아 교정 장치가 떨어졌다. 부랴부랴 병원에 연락했다. 다행히 오늘은 야간 진료가 있는 날. 남편에게 작은 아이를 맡겨두고, 딸과 단 둘이 길을 나섰다. 집에서 차로는 10분 남짓한 거리, 병원에 도착하니 시곗바늘이 어느덧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는 치료실로 들어갔고, 나는 대기실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오전에 받은 문자 한 통이 하루 종일 나를 복잡하게 했다. 머릿속이 깜깜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무엇보다 애써 부여잡고 있던 마음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 같아, 저녁에는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괜찮다며 스스로 다독이며 겨우 시간을 버티고 있었는데, 계획에 없던 치과까지 방문하니, 몸도 마음도 뜻하지 않은 멍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0여분의 시간이 흘러 치료를 마치고 아이와 함께 차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은 불그스름하게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인을 만나 부끄러워하는 여인처럼.
'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가장 사랑하는 하늘이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주 업무이다 보니, 저녁시간에는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아파트 1층에 거주하고 있어 다른 건물에 가려진 숨은 노을조차도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가장 사랑하는 하늘을 조금씩 잊고 살았는데, 우연찮게 사랑에 빠지는 시간을 맞닥뜨렸다. 우울했던 나에게, 좌절했던 나에게, 작은 위로를 보내는 것 같았다.
"아, 그래도 나오니까 좋다. 하늘 예쁘다. 그렇지? "
딸아이에게 하늘을 보라며 말을 건넸다. 좋은 건 같이 봐야 제맛이니까.
"응. 그라데이션 같아. 하늘의 노란빛이 예뻐"
딸아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노을 너머 반짝반짝 빛나는 노란 세상을 꿈을 꾸는 아이처럼.
"그러네,,, 휴,,, 예쁘네... 휴"
이곳저곳 상처투성이인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아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엄마, 근데 꿈은 멀리서 빛나고 있는 거래."
"응? "
"꿈은 멀리서 빛나고 있는 거래. 가끔은 그 빛이 희미해지거나 점점 멀어질 수도 있대. 근데 그 빛을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대. 내가 그 빛을 놓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래."
뜬금없이 꿈 이야기를 하는 딸아이. 나의 얼굴에서, 표정에서, 한숨에서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한 걸까?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하루 종일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걷기만 했던 내게 비록 시원한 물은 아니지만, 미지근해서 온기가 더 느껴지는 물 한잔을 건네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운전석에, 딸아이는 뒷좌석에 타고 있었기에 눈물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멋진 말이네. 어디서 들었어?"
"쟈렛에서 읽었어."
딸아이가 8살부터 좋아했던 마법의 정원 이야기 문고판 동화책, 이미 10번은 족히 읽었을 것이다. 몇 년에 걸쳐서 두고두고 그 책을 읽는 걸 보면서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을까 생각했는데,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꿈은 멀리서 빛나고 있지,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그 빛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거야. 엄마도 OO이도 빛나는 무언가를 향해 열심히 달려보자!"
평소와는 달리 내가 힘들어 보였을까? 무엇 때문에 끙끙 마음앓이를 하고 있는지 딸아이는 알았을까? 어찌 알고 그런 말을 건넸을까? 신통방통한 27살 어린, 나의 인생 선생님.딸아이가 건네준 한마디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아침부터 거절의 메시지를 받고는 허무하고 지쳐 우울의 구덩이로 빠져버릴 뻔한 내게, 나의 인생 선생님은 또 큰 가르침을 주었다.
비록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10년째 나에게 인생을 가르쳐 주는 너. 네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고, 네가 있어 나는 매일 성장하고 있지. 힘든 하루 지친 나에게, 갈 곳 잃어 희미해진 나의 눈동자에, 한 줄기 빛을 비추어주는 너.
그런 딸아이를 보니 생각나는 그림책
채인선 글, 김은정 그림의 『딸은 좋다』
그림책에서 엄마는 딸에게 말한다.
"너 자신의 꿈을 키우라고,
너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그것을 놓지 말라고"
내가 해주어야 할 말을 딸이 나에게 해주었다.
매일 밤,꿈의 빛 한줄기를 잡아 보겠다며 컴퓨터 앞에 앉아 씨름을 하고 있는 나에게, 때로는 힘들어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나에게, 엄마는 할 수 있다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언젠가 환하게 빛나는 그 노을 속에 엄마가 서 있을 거라고 마구마구 응원해주었다. 남편도 아들도 모르는 그 속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주고 따스한 손길로 소중한 가르침을 주는 나의 인생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