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의 가출을 했다. 새드엔드
전화벨 울리는 소리
"형님, 오랜만이에요. 잘 계시죠?"
"응 그래, 별일 없지?"
"네, 저야 뭐 늘 똑같죠. 그나저나 이번 토요일에 빅나인 공연 오실 수 있습니까?"
"... 음, 못 갈 것 같아. 회사일도 바쁘고 또 직원 하나가 2주간 휴가를 내서 일도 챙겨야 하고"
"바쁘시구나, 그럼 할 수 없죠"
"그런데 다름이 아니라, 라나가 월요일에 가출을 했어"
"네? 누님이 뭐라고요?"
"가출을 했다고. 그리고 전화 연락이 안돼, 그래서 말인데 동혁이 네가 전화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
"형님이 해서 안되는데 저인들 되겠습니까? "
"둘이 통하잖아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될라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한번 해볼게요"
"그래 고맙다"
동혁이에게서 전화가 온다. 월요일 이사를 가야 해서 일요일 수업 마치고 바로 대구로 간다는 문자를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고 나서야 그에게 보냈다. 그렇게 그의 집을 나와 연락을 끊었다. 그 후 그에게서 전화가 계속 온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협박적 메시지가 날아온다. 몇 날 며칠 받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동생에게서의 이유 없는 전화는 왠지 그 뒤에 그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래서 받지 않았다.
라나가 가출을 했다?
가출을 한 것이 아니라 도망을 쳤다.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그로부터, 그의 집으로부터, 그리고 언제나 편안히 쉬고 싶었던 그의 따듯했던 품으로부터.
최근 그가 보여주는 폭력성에 겁이 났다. 망상과 함께 언어폭력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왜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된 걸까? 그렇게도 다정하던 그였는데 내가 필요한 것을 말하기도 전에 눈치채고 챙겨주던 그였는데 이제는 어느 포인트에서 화를 낼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나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처음에는 화를 내더라도 오래가지 않고 먼저 화해하려고 다가왔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액션을 보이지 않는다. 강도는 점점 심각해지고 빈도는 점점 잦아졌다. 언어폭력의 수준은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건지를 의심하게 했다. 그와 함께 했던 두 달 동안 사이좋았던 날보다 서로 반목하고 언성이 올라가고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한번 다툼이 생기면 거의 일주일을 나는 차가운 바닥에, 또는 불편한 소파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저 평범한 수준의 인격을 가진 나로서는 굳게 닫힌 방문을 열 만큼의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차갑게 등을 돌린 그의 곁으로 먼저 다가갈 만큼 넓은 포용력을 가지지도 못했다.
작년 8월 그가 뇌좌동맥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사람들은 말했다. 이제 그의 곁을 떠나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말도 못 하고 부자연스럽게 몸을 쓰는 그를 보면서 안쓰러웠고 내 마음이 아직은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그는 자신이 아프니 또 어떤 일이 그에게 생길지 모르니 하루속히 같이 살아야 한다고 나를 설득시켰다. 측은지심을 가진 나는 흔들렸다. 주변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의 외각부위를 경미하게 다친 경우에는 일 년 정도 지나면 거의 원래 수준까지 회복하더라' 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서 나는 '그래,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데 지레짐작으로 겁을 먹고 성급한 판단을 하지 말자. 너무 쉽게 사랑하는 그를, 도움이 필요한 그를 떠나지는 말자'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동창이 그런다. 보통의 남자는 만약 자신에게 힘든 일이 닫쳐 사랑하는 여자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놓아준다고. 그처럼 곁에 붙잡아두려 하지 않는다고. 그때는 친구의 말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분노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지금은 그가 너무도 이기적인 남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나에게 했던 말들에서 알 수 있다. 말은 마음과 생각을 표출하는 거울이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그에 곁에 있기로 결정한 나의 상황은 전혀 고려치 않는다. 더군다나 이제는 고마운 마음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최소한 사고가 있었던 그날, 그의 곁에 내가 있어 바로 병원으로 갈 수 있었고 더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도리라고 한다.
작년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운전 중이던 그에게 급성 뇌경색이 왔다. 좌회전 도중 갓길에 세워둔 대형 화물차를 백미러로 치고 급정지를 하면서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옆에 내가 있었기에 서둘러 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지체 없이 왔기에 더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었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라고 의료진은 말했다. 주변 사람들도 사람 살렸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일로 보답을 받고 싶은 맘은 없다. 그냥 그가 알아주고 최소한 감사한 마음은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뇌의 각 부분은 주기능 하나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야. 주기능이 70%라면 나머지는 다른 뇌 부분들과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부수적인 기능 하며 지원을 하고 있지. 그래서 언어 부분이 다친 경우 주변에서 지원하던 뇌 부분이 언어 영역까지 기능 확장을 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회복하게 되는 거야. 그렇게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 부분을 다쳤더라도 감정조절에 대한 어려움과 분노장애 등이 나타날 수도 있어"
최근 일주일을 왜 그가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가 화를 내니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묻을 일도 아니다. 그와 있으면 그의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 같다. 그가 그렇게 나를 만든다. 노예의 삶을 살려고, 눈치 보며 살려고 그와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바보는 아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파스타를 만들어주며 화해를 시도한다. 음식이 목구멍에서 막힌다. 이게 뭐지? 그가 먹으라 하면 먹어야 하는가? 그냥 나는 그의 사랑을 받으면서 가진 것에 만족하며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그는 나만 중요하지 다른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었는데 지금의 그는 이제 더 이상의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다.
화해를 시도하던 그날 또 그가 화를 내었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그를 이기기 위해서 거짓으로 지어내고 있다고 한다. 눈을 번뜩이고 이제는 입에 거품까지 물었다. 그 순간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점점 심해지고 있다. 지금의 언어폭력이 언제든지 물리적 폭력으로 변하겠구나. 그는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가 아니다. 나에게 겁을 주고 힘과 폭력으로 나를 굴종시켜서 그의 옆에 두려는 것 밖에 없구나. 이제 끝이다.
그래서 떠났다.
여전히 그에게서 협박의 문자가 날아온다. 그러나 반응하지 않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경고한다 라는 말을 보낸 이후 더는 전화도, 문자도 오지 않는다
집요한 면이 있는 그가 이제 포기했을까?
오늘은 새로운 월요일
사무실에는 이번에 새로 채용한 신규직원이 있다
그녀와 나는 함께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
이사로 인한 일주일간의 공백 이후
오늘 내가 출근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그녀
그녀에게 이제 상황을 알려야 한다.
그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사랑이 오면 사랑하라"
NLP 수업중 교수님이 뜬금없이 말씀하신다.
새드엔딩으로 달려가는 우리가 떠올랐다.
그와 사랑했던 지난 2년이 떠오른다.
갑자기 눈물이 차 오른다.
떨어질것 같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더라도 나는 사랑이 왔기에 사랑한 것이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찾을 이유도 없다.
관계도 정리하고
보수도 없이 일했던 프로젝트도 정리하고
그렇게 그와 나는 오늘부터 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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