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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ug 30. 2024

딸과 보낸 시간과 능소화, 탄천길

다홍빛 능소화

얼굴을 내밀어

이제나 저제나

그리운 님 오시려나

초롱이 바라보지만

어느덧 저녁빛

아, 오늘도 하루가

애달피 이우는구나.

골목길을 돌아서면 붉은 벽돌 담벼락의 아롱다롱 예쁜 꽃.

심장이 헉! 하고 멎을 것 같은 강렬함과 그 위에 얹힌 사연에 능소화의 여름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떨린다.

조그맣고 아리따운 궁녀 소화. 하룻밤 성은 입어 빈이 되어 처소도 생겼건만 12년 동안 찾아오지 않는 임금을 오매불망 기다리기만 했던 소화. 처소 담벼락에 기대어 가슴 떨며 기다린 임금은 오지 않았지. 스러져 목숨이 떠날 때까지 기다림으로 채워진 나날들. 죽어서도 보고 싶어 밑에 묻어 달라던 소화의 간절함이 피어올라 꽃으로 환생한 능소화는 그 임금이 이제나 저제나 어디쯤 오려나 목을 길게 늘이고 내다보는 소화의 예쁜 얼굴 같다.

막내딸과 함께 송리단 길을 걷다 능소화를 만났다.

능소화 전설을 말하는데 딸은 능소화를 부른 가수 안예은의 노래를 듣다 가슴 저려 눈물이 났다고 한다.

딸을 만나면 꼭 한두 가지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좋다. 이미 라테의 엄마는 옛날 노래밖에 모르는데 요즘 젊은 이들이 듣는 노래 중 이런 노래도 있구나 하면서 들어 본다. 날 것 같은 목소리로 처절하고도 아련하다가 원망의 소리가 가득한 노래다.

탄천 둑의 능소화

능소화(Trumpet Creeper) - 안예은(AHN YEEUN)

이이이 히이 이이이이

해가 일백 번을 고꾸라지고

달이 일백 번을 떠오르는데

무인동방 홀로 어둠이렷다

문득 고개를 들면 다시

해가 일천 번 고꾸라지고

달이 일백 번을 떠오르는데

무심한 임은 기별은 없다.

죽어서도 원망하리

.

.

.

.

담장에 매달린 꽃잎이여.

https://youtu.be/hbeSbiaHKbw?si=pt-EZJzHoBWSnSKH

아직도 기다리나요?
딸이 좋아하는 샐러드를 이번엔 못했다.

"더워도 너무 더웠지요? 엄마가 잘 지내 주셔서 좋아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올여름, 두어 번은 딸이 좋아하는 유러피안 상추, 과일 파프리카 등으로 샐러드를 차려 점심을 먹었었다. 이번에도 마트에 들러 보았지만 마땅한 채소가 없다. 날이 너무 더워서인가 매대의 채소들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아 복숭아만 사고 돌아왔는데

"매번 어떻게 그렇게 먹어요. 엄마 힘들어요. 복숭아가 달고 맛있네요."

"뭐가 힘들어? 마음에 드는 채소가 없어서 문제지."

접시에 내준 복숭아가 맛있다며 먹고서는 송리단길로 출발했다.

여전히 양갈비 집은 지난번처럼 오픈 시간이 지났는데도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쌀국숫집으로 향했는데 다섯 팀이 대기하고 있다.

"엄마, 근처에 샤부샤부 집이 있는데 어때요?"

"좋지, 좋아하는 거잖아."

다행히 딱 두 자리가 비어 있다.

딸은 두가지 맛 마라 샤브, 난 담백한 샤브.

송리단 길의 음식점들은 대형 식당은 없어 보인다.

주택들을 리모델링을 해서 음식점으로 바뀌어서인지 대체로 홀이 작아 테이블이 많지 않다. 맛집으로 소문난 집들은 대기 팀이 많다. 또 곳곳에 리모델링하는 곳이 많이 보인다.

맛난 점심을 딸에게 대접받고 호숫길로 향하는데 엉뚱하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내게

"엄마, 안네비가 고장 났어요? 이 길이 아닌 것 같아요. 컴퓨터 로딩이 제대로 안된 느낌인데요. ㅎㅎㅎ~"

"어? 그렇네. 송리단길이 동호에 있다고 사람들한테 설명해 주고는 찰나에 서호라고 생각했네. ㅋㅋㅋ~"

"원숭이 여사님이 나무에서 떨어졌네요. 하하하~"

워낙 길을 잘 아는 내게 딸들이 붙여준 안내비게이션이 순간 딴생각으로 딸의 짓궂게 놀리는 재미에 서로 음보가 터졌다.

상점 앞의  예쁜 꽃

한가로이 대화 나눌 상대가 없다가 막내딸과 얘기를 나누니 이래도 즐겁고 저래도 즐겁다.

역시 딸은 머리가 팍팍 돌아간다. 두뇌 회전이 빠름을 느낀다. 역시 MZ세대라 하면 딸은 자기는 MZ세댄 아니고 낀세대에 속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겐 여전히 상큼 발랄한 MZ로 보인다.

집에 들어와 딸은 차 한잔 가볍게 마시고 컴퓨터 안 되는 것은 없냐고 묻는다. 딸 가고 난 다음에 앗!, 하지 말고 생각해 내라는 딸. 난 또 웃음이 입가에 고인다. 바쁜 중에도 엄마 휴무라고 찾아와 함께 밥도 먹어주고 웃음까지 듬뿍 안겨 주는 딸이 마냥 예쁘고 고맙다.

다음 달엔 독일에 일주일 출장 간다고 하면서 귀한 봉투를 선사하며 추석 지나고 오겠다고 한다. '괜찮아 추석에도 일할 거야. 바쁜데 오지 않아도 된다'면서 보낸다.

딸을 보내고 잠시 쉰다. 8월 내내 더위에 지쳤는지 피곤함에 살포시 잠이 들었다가 탄천으로 나간다.

제법 선들한 바람이 불어 오랜만에 땀방울이 목을 타고 내려오지 않아 산책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여름은 모든 것을 무성하게 키워 놓는다. 풀도 나무도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고 모든 땅을 덮어 버릴 듯이 푸른 덩굴들의 기세가 당당하다. 마지막인 듯 바람을 담아 목이 터져라 울어 젖히는 매미들의 합창과 가을을 알리는 풀벌레들의 소리가 듣기 좋은 것은 살인적인 더위로 지쳤던 여름이 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

어느새 해가 서쪽 하늘에 숨었다. 번화한 도시 한편에 이토록 그윽하게 노을 지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가슴이 뛴다. 재작년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인의 말만 듣고 이사를 왔다. 살면서 발견한 이 탄천 길을 산책하면서 바라본 노을로 시가 한 편 나오고 브런치 작가이신 최용훈 교수님께서 영역도 해주셔서 탄천의 노을은 내게 사랑이기도 하다.


https://brunch.co.kr/@yhchoi90rw/848

가장 복잡한 도시에서 숨 막히듯 사는 세월, 몸을 움직여 잠깐 나오면 제대로 크게 호흡을 하게 된다. 헛둘헛둘 팔운동도 해가며 걸어도 어느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도 없이 자유로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멀리 물새 소리도 드물게 들려오고 부지런한 누군가의 손길로 가꾸어진 천일홍, 분꽃, 백일홍이 보여 반갑기도 하다. 시간이 허락하면 잠깐이라도 사계절을 톡톡히 느껴보는 자연의 너른 품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이상 기온에 푹푹 찌는 더위로 자주 나와 보지 못한 탄천길. 이제 가을이면 낮에도 나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자주 보던 고라니도 보고 물에서 유영하는 오리와 철새들. 왜가리, 귀족처럼 보이는 백로 부인들도 보고 싶다. 너무 뜨거워 삶아질 것 같던 여름을 지냈는지 무척 궁금하다.

시원한 매미소리, 온갖 풀벌레들의 향연.

사진; 양유정. 안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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