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나침반을 따라가며 통찰을 얻는 법
감정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이 우리 본성의 평화로움으로 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내 생각의 방향이 삶의 진실과 일관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가슴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든다면 우리의 생각의 일부가 깊은 진실과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감정 나침반이 드러내 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가 붙잡고 있는 생각이나 믿음이 우리 내면의 깊은 진실에서 멀어져 있을 때 부정적 감정이 발생합니다.
같은 사건이나 경험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큰 감정적 동요를 겪지 않는 반면 다른 사람은 크게 영향을 받기도 하는 것을 보신 적일 있을 겁니다. 사람마다 붙잡고 있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신념들은 한 개인으로 겪어온 과거의 경험에서 생겼을 수도 있고, 우리가 자라온 사회와 집단의 무의식의 영향을 받을 것일 수도 있으며, 몸을 받아 태어난 이상 누구나 갖게 되는 세상으로부터의 근원적인 분리감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야지 사랑 받을 수 있다. 돈이 얼마 얼마는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인생은 안전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않는 인생은 가치가 없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 등등 내가 행복하거나 내 인생이 가치 있거나 안전하기 위해서 어떤 외부적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붙잡고 있으면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납니다. 잠시 조건이 충족되는 동안 안심하더라도 상황은 언젠가는 변하거나 늘 변할 가능성을 늘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일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이 세상 어디에선가는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을 겪는 모든 사람들이 불행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인생이 가치없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러면 내 인생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혹은 어떠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믿음이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존재하는 행복을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내면의 깊은 진실에서 어긋난 믿음 때문에 스스로 불행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깊이 빠질 때 내 인생의 행복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됩니다.
내면의 깊은 진실이라니, 거창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진실은 단순히 나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이, 나는 지금 이대로에서 단 한치도 변화하지 않고도 이미 가치를 메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 바로 그 깊은 진실입니다. 그 진실에서 멀어진 생각들을 붙잡고 있을 때 불행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인생을 제약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도록 감정이 친절하게도 불편한 느낌으로 신호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감정 나침반은 자기 사랑을 회복하려는 우리에게 유용한 도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불편한 감정이 일어난다면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을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불편함과 불안함을 자아내는 생각의 실체를 똑똑히 바라보고 내려 놓고 마음을 더 넗고 더 너그럽게 쓰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친절하게, 조금 더 온화하게, 조금 더 넒게 조건 없이 나의 감정을 허용하고 안아줍니다. 나를 더욱 깊이 사랑하라는 신호를 보내주고 있는 지금의 이 감정에 감사하고, 지금 이 경험을 겪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넓어지고 커질 나의 마음에 미리 감사합니다.
감정의 실 따라가기는 감정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허용하여 감정이 주는 힌트를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감정 나침반이 가리키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감정 너머에 있는 깊은 진실에 가 닿는 법입니다. 내 본성에 이미 존재하는 조건 없는 평화와 사랑의 메세지를 발견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감정에 완전히 매몰되어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일 때 시도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앞서 소개 드린 감정 만나기과 감정 안아 주기를 오랫동안 연습하다 보면 감정을 느끼면서도 감정 너머의 하늘의 자리에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여기 소개 드리는 감정의 실 따라가기를 하면 감정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허용하며 따라갈 수 있습니다.
감정의 실 따라가기의 핵심은 나타나는 감정을 판단 없이 온전히 다 느껴주며 함께 해 주는 것입니다. 불편한 감정을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감정을 온전히 느끼며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감정을 바꾸거나 통제하지 않고 그저 온화하게 허용하는 배경에서 바라봅니다.
이렇게 감정과 함께 현존할 때 서서히 감정과 몸의 느낌이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에 자책으로 시작했던 감정이 무력감에서 슬픔으로, 그리고 자기 포용으로 바뀌기도 하고, 화에서 시작했던 감정이 상실감에서 연민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껴주면서 하나씩 하나씩 그 감정에 얽혔던 실타래가 풀리며 감정 너머에 자리 잡고 있던 나의 생각에 대한 통찰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감정의 실을 따라간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그 과정이 마치 실을 따라가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며 하나씩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그 감정 실의 끝자락에서 통찰에 이르게 됩니다. 어떻게 진행이 될 수 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일기장에 써 두었던 제 경험을 나누겠습니다. 실을 따라가는 경험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으니 하나의 예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감정의 실 따라가기 사례
서귀포에 놀러 갔다가 제주시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였습니다. 갑자기 돈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올라왔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둔 상태에서 혹시 앞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걸 충분히 뒷바침해 줄 수 없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 졌습니다. 큰아이가 운동을 시작한 것과 관련되어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감정이 몸에서 느껴지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몸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며 느끼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슴 왼쪽 상단이 찔린 듯한 느낌이었다가 차차 서서히 번지며 양 어깨 앞 쪽으로 눌림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체한 것 처럼 트림도 나왔고 시간이 지나며 답답한 부위나 느낌이 조금씩 변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느껴주고 있는데 갑자기 제가 어릴 적에 엄마가 엄마 이름으로 돈을 빌리고 도망간 사람 때문에 갑자기 큰 빚을 진 상태에서 몸이 아파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내가 빚도 없고 자산도 있고 아이들도 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돈 걱정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어린 아이들이 줄줄이 여섯에다 안 그래도 가난한 살림에 생전 처음으로 큰 빚을 지게 된 엄마는 얼마나 막막하셨을까…
당시 어머니의 마음이 헤아려지며 눈물이 나왔습니다. 아...어머니가 당시에 이런 고통을 겪으셨겠구나... 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진 않으셨을 텐데... 처음으로 느껴본 어머니의 생생한 심정에 한없는 연민이 일며 제 가슴이 무방비하게 열렸습니다.
그러자 줄줄이 섬광처럼 떠오르는 어릴적 기억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저렴한 재료로 요리해서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해 주셨던 기억과 청과 도매 시장에 가셔서 멍이 들어 팔기 어려운 제철 과일을 박스째 잔뜩 사 오셨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외양 어선 선원이셨던, 이복 외삼촌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외삼촌께서 타신 배가 부산항에 닿으실 때마다 어머니가 삼촌이 좋아하시는 미더덕 찌게를 한 솥 해 두셨던 기억이었습니다. 부족한 살림에도 그 삼촌은 몸이 약하다고 약재를 구해서한약을 달여 놓으셨던 기억, 부산항을 거쳐 가는 온갖 친지 가족 친구 모두 재워 주시고 입에 맞는 따듯한 밥을 지어 꼭 대접하셨던 기억, 그리고 그 외삼촌도 우리에게 이런저런 선물들을 챙겨 주셔서 어린 우리에겐 산타 할아버지와 같았던, 그 모든 풍성한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때 영도에서 자갈치 시장을 건너는 통통배를 처음 탔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배삯 50원을 내고 탔던 그 허름한 통통배는 지금껏 타본 그 어느 유람선보다 멋진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동안 까맣게 있고 있던 기억이 선미에 앉아 손을 뻗어 만졌던 물살의 벅찬 감촉까지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그토록 찢어지게 가난한 중에도 우리는 참 풍족했구나. 많은 사랑을 받았구나… 어린 시절 부족했던 걸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풍족한 경험도 참으로 많았었구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지 풍요가 우리와 함께 했구나.
잊고 있었던 풍요로운 기억들이 떠올라도 가슴이 에이는 느낌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 마음에 이 아픔이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전히 시큼거리는 아픔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냥 거기 있어도 괜찮다고… 계속 두려워해도 괜찮다고. 이렇게 느끼고 있는 나도 조건 없이 사랑한다고. 그리고 나 자신을 마음으로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그 순간 차의 라디오에서 비틀즈의 노래 <렛잇비>가 나왔습니다. 노래 가사가 큰 위로가 되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가슴이 더욱 아파지면서 오른쪽 가슴 식도 옆에 아주 강한 눌림이 느껴졌고 트림과 하품이 마구 나왔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제주 중산간 도로의 언덕 중턱에서 말들이 몇 쌍씩 짝을 지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엄마 말 옆에서 망아지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문득 통찰이 올라왔습니다.
“아… 엄마 말이 망아지를 먹이는 게 아니구나. 자연이 제공하는 것이구나. 엄마는 그저 망아지와 함께 할 뿐이구나. 자연이 이렇게 망아지를 먹여 주고 있듯이 우리는 이제껏 삶으로부터 꼭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아 왔구나... 알든 모르든 삶이 늘 보살피어 왔구나. 지금 이처럼 살아 가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증거이구나...”
우리 삶에 이미 존재하는 풍요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드러났습니다. 가슴으로 느껴졌습니다.
아이에 대한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아이는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을 것입니다. 자연의 일부인 나를 통해서건 다른 통로를 통해서건 꼭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을 것입니다.
이제껏 늘 그랬듯이, 나의 어릴 적에도 그랬듯이, 내가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우리 삶에는 늘 풍요가 존재할 것입니다. 부족함마저도 삶의 풍요를 더욱 깊이 느끼게 해주고 알아보게 해주는 고마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경험을 사랑하고 그저 감사할 일입니다.
통찰이 떠오름과 함께 온몸에 에너지의 전율이 흐르더니 몸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사그라들었습니다. 고통의 에너지가 울렁이는 느낌으로 변하며 전율과 함께 흘러 나갔습니다. 고통이 흘러 나간 그 자리에 평온과 사랑과 감사가 가득 찼습니다.
사례에서처럼 감정의 실을 따라갈 때는 감정이 나의 몸에 나타나는 느낌을 온전히 느껴주는 것만 하면 됩니다. 그저 그 감정을 거부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몸의 어느 부위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가만히 느껴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감정과 관련된 기억이나 통찰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감정을 느낄 때 곧바로 왜 이 감정이 나타났나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머릿 속 생각으로 분석해서 감정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 몸에 나타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느껴주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이나 통찰에 마음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훨씬 더 열려 있고 수용적인 느낌이며 내가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는 느낌입니다.
위 예에서 드러난 제 삶의 기억과 통찰은 애를 써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느낌을 온전히 느껴주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런 저런 기억들과 통찰들이 저절로 떠올랐으며, 심지어 차의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래 가사와 바깥 풍경마저 자연스럽게 열린 마음을 통해 깨달음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모든 것을 허용할 때 마음이 열립니다. 그 열린 마음을 통해서 나를 제약하는 생각들을 넘어선 통찰이 드러납니다. 통찰이 드러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감정을 허용해 주는 것만으로 감정의 그릇이 커지고 나의 마음이 더욱 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감정은 흘러갑니다. 그러니 감정을 허용하고 있는 그대로 느껴줘도 괜찮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감정의 실 따라가기가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을 마주하는 것에 익숙해진 후에 감정을 거부감 없이 감싸 안아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시도하면 됩니다.
삶에서 반복되는 괴로움이 있고 그것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감정의 실 따라가기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내 안의 고착화된 믿음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감정을 피하느라 바빠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정 너머에 숨어 있는 통찰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가진, 나 스스로를 제약하는 믿음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평소에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고 어려운 상태라면 감정의 실 따라가기는 마음에 여유가 생긴 후로 미뤄두는 것도 좋습니다. 감정에 너무 매몰되어 빠져버리면 감정을 온전히 허용하며 보둠어 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친절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늘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따듯하고 조금 더 여유롭게 스스로를 품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지 출처:
Castorly Stock @ www.pexels.com/photo/brown-spool-of-rope-on-gray-concrete-floor-365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