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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Feb 11. 2021

키가 큰 금발 청년


마라케시를 걸으며 보았던 풍경



발길 닿는 대로 마라케시(Marrakesh)를 걸었다. 대부분의 표지판에 아랍어와 프랑스어가 병기돼 있었고, 위로 높게 뻗은 야자나무들이 곳곳에서 시선을 사로잡았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주저 없이 마미드 엘 기즐렌(M'hamid El Ghizlane, 약칭 M'hamid)행 탑승권을 끊었다. 모로코 남단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사하라 사막과 맞닿아 있는 곳으로 향할 참이었다.



마라케시의 버스 터미널



목적지까지는 버스로 열 시간이 넘게 걸렸다. 도로가 거의 포장돼 있지 않아 쉴 새 없이 덜컹대는 버스 안에서는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몸을 비트는 와중,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들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바로 옆으로 소를 잔뜩 실은 트럭이 지나가는데, 허술해 보이는 울타리 속에 꾸역꾸역 갇혀 있는 소들이 행여나 도로로 떨어져 내릴까 조마조마했다. 몸집 큰 아낙네가 엄청난 양의 나뭇가지들을 머리 위에 인 채 지나가고, 아이들은 먼지가 자욱한 황톳빛 도로 위로 친구들과 나란히 걸어갔다. 버스에선 아랍어로 된 높은 음역의 노래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들을 넋을 놓은 채 보고 있자니, 꿈과 현실의 경계도 급격히 허물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초목이 울창한 스페인의 구릉을 넘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황량한 돌산 사이를 거칠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마음을 옥죄고 있으니. 마미드에 도착해서도 정확히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버스 밖으로 보였던 풍경



목적지인 므하미드는 전혀 유명한 마을이 아니다. 카사블랑카마라케시, 페즈 등 모로코의 다채로운 대도시들은 마을 설비도 잘 되어있을뿐더러 관광객들로 넘쳐나지만, 모로코 남단의 시골 마을인 므하미드에서는 관광이 목적인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때문인지 버스 안에도 온통 모로코 현지인들뿐이었다. 


갑자기 한 모로코인이 조심스레 옆자리에 앉더니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국적이며 목적지를 물어보더니 갑자기 돈뭉치를 꺼내며 “돈 필요해요? 나 마미드에 집이 있는데, 혹시 놀러 올래요?”라고 속삭인다. 행여나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들을까 싶었는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말이다. “전 마미드에 있는 친구 집에 가는 중입니다. 당신 집에 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하니 미안하다며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어딜 가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홀로 여행하는 동양인 여성이라는 위치에 있는 만큼 어영부영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특히 모로코에는 동양인 거주자나 여행자가 드물어서인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한편, 온통 모로코 사람들뿐인 버스에  금발 청년이 눈에 띄었다. 버스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고개를 바짝 숙인  통로를 걸어오던 그는 키가 무척 컸고,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피부색이 밝고 유럽 스타일인데, 모로코의 시골 마을로 여행을 가는 관광객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혹시 나와 같은 워크어웨이어(Workawayer, 노동을 제공하는 대가로 숙식을 지원받으며 여행하는 사람)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미드 종착점으로 하여 달리고 있는 버스는 도착 이전에 다양한 경유지를 거칠 예정이었기에, 그가 반드시 므하미드 향하고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나와 비슷한 여행자일 거라는 예감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 와중, 그가 말을 건네왔다.


마미드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을까요?”


세상에, 나와 목적지가 같다! 관광지라고 보기 어려운 마미드에 가는 외국인이라면, 역시 나처럼 노동과 숙식을 교환하며 경비를 줄이는 워크어웨이 여행자일까?


“열 시간쯤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마미드에는 무슨 일로 가세요?”

“워크어웨이 아세요? 사막 입구에 있는 캠프에서 지낼 거에요.”

“어, 저도 워크어웨이로 마미드 가는 중인데. 혹시 브라힘씨의 집에 가는 거예요?”

“네!”


알고 보니 그는 목적지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될 장소도 나와 완벽히 일치했다. 똑같은 워크어웨이 호스트와 만나기로 되어 있던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치 앞도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마미드로 향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니 마음이 놀랍도록 안정되었다. 그새 어두워진 도로에는 불빛 한 점 없었지만, 더는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후 모로코에서의 여행을 내내 함께하게 된 독일 친구 야니스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배낭을 멘 야니스
야니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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