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딸과 산책을 하는 데 아이가 내 발걸음에 맞춰 발을 바꾸고 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길을 걷는 데 남편이 왼발을 앞으로 하면서 발을 바꾸고 있었다. 나의 왼발이 앞으로 나가는 것에 발란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는 늘 내가 걷는 발걸음에 맞춰 길을 걸었다. 왼발이 나가면 그도 왼발을 앞으로, 오른발이면 오른발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하던 어깨동무도, 잠잘 때 해주는 팔베개도 늘 불편해했었다.
지난 연애의 상처는 그 사람을 잊으면 아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보이스 피싱 사건 후, 결혼 전부터 자신을 믿지 못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남편으로부터 듣고 나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었다. 단순하게 상처의 원인이 사라지면 아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상처로 인해 파생된 생각과 태도의 변화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남편에게 그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말을 많이 하지도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도 인색했다. 어떤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아무리 잘해주어도 언젠가는 떠날 수 있다는 무의식이 작동했었나? 어쩌면 사람은 잘해주면 어느 순간 익숙해져서 상대를 쉽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눈치 빠르게 다른 상대에게 적용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의식하고 행동하든, 의식하지 못했든 진심은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에 믿지 못했다고 느꼈다면 분명 나에게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는 여러 차례 농담처럼, 혹은, 진담처럼 이야기했었는데 그때는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었다.
이번 보이스피싱 사건 이후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사라졌고 동시에 나도 함께 멈춰있다. 멈춰진 일상이 가장 슬펐다면 믿어질까? 매일 걷는 아파트 단지 안 산책길이, 집 앞에서 이어진 작은 산으로 가는 시간이, 마시던 차가, 가볍게 여는 sns가 사라졌다. 순간순간, 아이들에게 웃는 입가의 근육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리고 서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질은 계속 움직이기에 발산하듯 터져 나오는 것을 멈춘다는 것은 수렴하고 되돌아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운을 바꿔야 하고 이미 바뀌어가 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벚꽃은 만발하고 연초록색 잎들이 짙음을 밀어내고 있다. 자연은 여전히 순환하고 있고 몸도 마음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작년에 죽음에 관한 전시를 일 년간 준비하면서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운 길 위에 인생의 가을맞이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환절기 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다. 연결시키고 조정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안간힘을 써서 열을 낮추고 힘을 길러 가을맞이를 다시 준비하고 있다. 눈물겨운 애씀의 안타까움 보다 마음 아파도 바로 보아야 하고 읽어야 한다. 감기약을 먹으면 7일, 안 먹으면 일주일 걸린다고 한다. 약이 없다는 이야기다. 약은 없어도 스스로 이겨내면 몸은 점점 더 다양한 항체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남는 장사이다. 어떤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더 이상 쉽게 걸리지 않는 몸으로 만들면 그만이다.
상황이 이렇게 까지 벌어진 것에 대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그에게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맞다고 생각하는 것, 옳다고 생각했다는 것에 한걸음 물러나 다시 보기를 시작해야 했다. 어쩌면 사랑한다고 했지만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구나. 그에게 입을 닫으면서 막연하게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덜 사랑해야 덜 상처 받는다는 아주 미숙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 주어진 상황도 내 행동도 모두 쓸쓸하고 잔인했다. 그리고, 가족이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그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그 사람을 안다고 본질에 대하여 아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그 사람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알고 싶을 때 비로소 소통은 시작된다…
- 2017, 그와 그녀의 36.5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