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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라는 트라우마

빛과 그림자 _ 13

by 루메제니

학창 시절, 유난히 죽이 잘 맞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고민과 비밀을 공유했고, 작은 기쁨부터 큰 슬픔까지 함께 나누었다. 종종 밤새 통화도 하고, 서로를 위해서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의 우정은 변치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 둘 변해갔다. 처음엔 사소한 차이였지만, 점점 그 차이가 커지더니 더 이상 공통점을 찾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멀어질까 두려워 배려하려는 마음은 오히려 점점 더 마음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배려라는 포장지에 가려져 서로의 진심을 나누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그녀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는 오랜 관계의 마지막 장이 되었다. '넌 항상 네 생각만 하는구나'


나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더 이상 친밀함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다시는 누군가와 깊이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 깊은 물에 빠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도 물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그렇게도 가까웠던 관계의 종말의 여파는 생각보다 길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머리로는 괜찮다고 생각해도, 마음 한편이 채한 듯 불편했다. 관계의 트라우마였다.


체계적 둔감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먼저 물가에 서서 물을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물에 들어가는 연습을 한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을 점진적으로 직면하여 익숙해지는 방식이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그보다 복잡했다. 사람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며, 각자 다른 감정과 기준을 가지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감정을 직면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만으로는 관계의 트라우마를 온전하기 어렵다.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연습은 바로 자신과의 솔직한 대화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기 전에, 내가 왜 그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느낀 서운함과 실망감을 무시하지 않는 태도도 필요하다. 상대방을 억지로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는, 내 감정을 먼저 정리하고 그 감정을 존중해 보자. 비로소 '역지사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내 감정을 객관화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이해하면서 나는 다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여전히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렵지만, 관계야 말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거울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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