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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Oct 21. 2024

팔자 좋은 미숙

1회

그가 티브에 나왔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화면에는 한국의 알 수 없는 장소에서 20여 명의 프랑스 군인이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 보였다. 곱슬머리의 청년 한 명과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만 빼고 모두 군모를 쓰고 있었으나 날씨가 더운지 한 명은 웃통을 벗고 몇 명은 민소매 조끼를 입고 있거나 바지를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곱슬머리의 청년은 유난히 어려 보였다. 노장은 곱슬머리의 청년이 바로 18세의 자신이라고 했지만 젊었을 때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참전 용사가 앉은 소파와 직각으로 놓인 의자에 앉아 늙은 군인이 펴 놓은 앨범 속 사진을 손으로 짚으며 질문했다. “그때 무엇이 가장 기억나나요?” 참전 용사의 흐릿한 푸른 눈에 물기가 차오르며 조금씩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노인의 말이 자막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사람을 살리러 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죽는 걸 목격하며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여기 오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그가 다시 두 명의 젊은 군인이 찍힌 사진을 가리키자 노병은 굽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그 친구는 휴전 한 달 전에 소총에 맞아 전사했어요. 이 사진을 보는 게 괴로워요….” 그러나 이내 손을 내리며 “한국 사람들이 저희의 희생을 알아줘서 감사해요.”라고 마무리했다. 미숙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보다 화면에 나온 그의 옆모습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이 창피해.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미숙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손이 클로즈업되었을 때 그 하얀 손이 낯익었다.  


5년 전 그는 그 하얀 손으로 미숙이 보고 있던 프린트물 속 사진을 가리켰다. “이런 해변에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지 않니?( Ne serait-ce pas sympa d'aller à cette plage ensemble ?)” 거기엔 프랑스의 유명한 휴양지 에트르타의 알라바스트라 해변과 멀리 코끼리 코 모양의 절벽이 보였다. 미숙은 프랑스어를 잘못 알아들었는지 알았다. “저랑 같이 간다고요?( Tu parles d'y aller avec moi ?)” “응, 좋을 거야.(Ouais, ce serait bien.)” 미숙은 너무 놀라서 “저는 결혼했는데요.(Mais je suis mariée.)”라고 자신도 모르게 크게 말하자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른 조로 이동해 갔다. 4명이 한 조를 이뤄 회화 수업들 듣던 학생들 대부분은 초보 수준이라 미숙이 크게 말한 내용만 빼고 그라 말한 부분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나 미숙 옆에서 조금 떨어질 바로 옆 조에 앉아있던 영식은 이상한 눈초리로 그와 미숙을 바라봤다. 50대 후반인 영식은 오래전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세네갈에서 몇 년 산 경험이 있다고 했다. 미숙은 영식의 시선을 의식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 미숙은 수업 시간에 늘 남편이 가장 친한 친구이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 대해 은근히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했었다. 실제로 미숙은 모범적인 가정을 이룬 게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떤 유혹도 느끼지 않을 확신이 있었다. 아파트에서 가끔 만나 차를 마시는 엄마들이나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대학 동창들이 티브이에 나온 멋진 배우에게 마음이 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겉으로는 그들과 맞장구를 쳐줬지만 미숙은 그런 마음이 한 번도 든 적이 없었다. 따라서 영식에게 미숙과 또마가 나눈 대화가 야릇한 썸의 시작처럼 보였다 해도 그녀는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그건 그냥 프랑스어 대화 연습일 뿐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몇몇 학생들이 또마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 미숙은 급히 가방을 챙겨 나가는데 또마가 다음 주에 보자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미숙 외에도 정민과 다른 학생들이 줄줄이 교실을 나가고 있어서 미숙에게만 한 인사는 아니었지만 미숙은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별일이다. 그가 해변에 함께 가자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왜 이럴까? 미숙도 자신에게 이상한 흥분이 샘솟는 게 의아했다. 다른 남자가 그랬다면 징그럽고 불쾌해서 화가 났을 텐데 또마가 그런 게 싫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가 해변에 가자는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마치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미숙에게 반한 것 같아 우쭐했고, 알 수 없는 감정이 깨어나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정민이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미숙은 계속 상상의 나래를 폈을지도 모른다. 

"언니는 오늘도 선생님과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던데 저는 왜 그게 잘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언니와 선생님 말하는 것 들으면 다 알아듣겠는데 저는 말이 나오지 않아요."

"내가 무슨. 그냥 아는 단어 붙여서 대충 말해보는 거잖아요. "

"알아요. 언니는 그냥 쉬운 단어로 빨리 말하는데 저는 그게 안 돼요. 저도 다 아는 표현인데… 입 밖으로 빨리 안 나와요. 그리고 제 말은 선생님이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언니 말은 잘 이해하잖아요."

"아냬요. 선생님이 영어를 알아들어서 영어를 섞어가며 얘기해서 그렇게 보이는 걸 거예요."

"아무튼 몇 년을 해야 입이 트일지 모르겠어요."

"이제 겨우 학원 2년 다니고 벌써 입이 트이길 바라는 거예요? 아니 2년 다녀도 실제로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수업받는 동안 프랑스어를 얼마나 말한 것 같아요? 내가 재미 삼아 재 보니까 실제로 내 생각을 온전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은 매 수업마다 15분도 안 되더라고요. 나머지는 선생님이 말하고 우리말 고쳐주고 우리는 그걸 받아 적고… 회화 시간인데 말하는 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아요. 그러니 당연히 말하는 게 늘지 않죠. 말을 해봐야 하는데 할 기회가 없잖아요."

"맞아요. 무엇보다 틀릴까 봐 두려워요. 학교에서 문법만 배워서 그런가 봐요. 영어도 그렇고 프랑스어도 그렇고."

"난 대학 때 프랑스어를 전공해서 프랑스에 6개월 살다 왔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 자기처럼 처음 불어를 배운 사람보다는 몇 마디 더 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보다 자기야 말로 프랑스 전공도 아닌데 겨우 2년 학원 다니며 그 정도 말할 수 있는 게 난 더 놀랍던데."

"제가요? 무슨 말을 했는데요?"

"지난번에 자기소개 잘했잖아요."

" 에이, 그건 집에서 미리 써서 얼마나 외웠는데요. 벌써 반은 잊어버렸어요."

"그래도 그게 시작인 거예요. 쓰고, 읽고, 외우고, 까먹고, 다시 반복하고… 나도 대학 졸업하고 30년간 프랑스어 쓸 일이 없어서 하나도 하지 않고 오히려 영어만 열심히 공부해서 프랑스어보다 영어가 더 빨리 나와요. 외국어는 용불용설이에요."


지하철 역에서 다다르자 미숙은 정민과 반대 방향의 전철을 타기 위해 개찰구로 향하며 다음 주에 보자고 짧게 인사를 건네자 정민도 같은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다음 주에 시댁에서 여행 가요. 가기 싫지만 함께 가야 해요. 2주 후에 봐요."


미숙이 정민과 거의 일 년 가까이 같은 반에서 회화 수업을 했지만 서로 카카오 친구가 된 건 한 달 좀 전이었다. 처음에 미숙은 왜 또마 선생님이 인기가 있는지 몰랐다. 다른 원어민 회화 수업은 많아야 6~7명이었는데 또마 선생님 반은 12명이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정민과 처음 같은 조로 배정받았을 때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정민은 미숙이 중간에 또마 선생님 반에 들어온 게 더 놀랍다고 했다. 보통 학생 재등록이 100%여서 자리가 없는데 한 학생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자리가 난 것 같다고 했다. 또마 선생님이 그렇게 잘 가르치는지 물었더니 그보다 그가 잘 생겼고 예전에 무슨 예능 프로에 고정 출연자로 나온 경험 때문일 거라고 했다. 


티브이에서는 훨씬 잘 생겼었는데... 약간 브레드 피트 인상도 있고. 

그건 벌써 5년 전이잖아요. 서양인은 확실히 동양인보다 빨리 노화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여전히 멋있어요. 지금은 머리를 길러서 왠지 더 섹시한 것 같고요. 하하


쉬는 시간이라 선생님이 없는 틈을 타서 우리 조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선생님에 대해 한 마디씩 했다. 미숙은 주말 뉴스 외에 티브이를 거의 보지 않아서 학생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고 결혼한 여성이 외간 남성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게 민망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모른 척하면 특이하다고 생각할까 염려되어 그들이 웃을 때 함께 웃었다. 한바탕 호탕한 웃음이 수그러지자 모두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미숙도 별생각 없이 카카오를 열었다. 문자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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