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스크 Nov 17. 2020

짙은 첫 기억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로써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질환 중에 하나다. 보통 과거에 경험했던 특정한 사건 때문에 생기는데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경우 그때의 기억과 함께 감정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불안 증세를 보이게 된다. 심박수가 빨라지고 숨이 차며 식은땀이 나거나 사소한 일에 화들짝 놀란다. 이런 증상이 계속되면 평상시에도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려 수면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급기야 히스테리, 망상, 공포증 등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 있기에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가 필요하다. 특히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지 않거나 높은 곳을 피하고, 대인 공포증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얼굴이 붉어지고 손이 떨리며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될지 몰라 당황한다. 엘리베이터처럼 좁고 꽉 막힌 공간에 있을 때 두려움을 느끼면 폐쇄 공포증을 의심해 볼 수 있는데 지나치면 공황장애로 발전할 수 있다. 이외에도 무대 공포증, 주사 공포증, 치과 공포증 등 다양한 경우가 많다.




요즘에는 비닐하우스 재배가 보편화되어서 초겨울부터 햇딸기를 맛볼 수 있지만 내가 어릴 때 딸기의 제철은 원래 5월 중순부터 초여름까지 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빨갛게 익은 딸기는 보기만 해도 입안에서 군침이 돈다. 당시 나의 엄마는 대량의 제철 딸기를 싸게 구입해서 직접 설탕을 넣고 고아 수제 딸기잼을 만들어 주셨다. 엄청 큰 냄비 속에서 딸기잼이 우글지글 끓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아니 배고플 때마다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먹었다. 딸기잼뿐만 아니라 단팥이 들어간 달콤한 찐빵, 초콜릿 과자, 빙과류를 좋아해 입에 달고 다니던 나에게 충치가 생긴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치과 치료의 공포는 친구들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웬만해서 치과를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엄마의 손을 잡고 갔던 치과는 예상한 바대로 시끄러운 기계 소리, 누군가의 울음소리와 괴성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느새 나는 통증을 잊은 채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진료의자에 누웠는데 의사 선생님이 무뚝뚝하고 투박스럽게 "치과 치료 시에 갑자기 움직이면 절대로 안되고 힘들면 손을 들어"라고 말했다. 치료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입안에 기구가 들어오는 순간 구역질이 나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강압적인 분위기에 지시대로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첫 치료는 잘 끝났지만 치과 치료에 대한 작은 트라우마는 바로 그날부터 생겼다.



처음으로 갔던 치과에서 불편했던 기억은 그 이후에 치과로 향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요즘에는 치과 치료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역할 놀이 장난감도 많고 무엇보다 주변에 어린이 치과가 많이 생겼다. 의료진의 친절한 미소와 나긋한 목소리는 어린이 치과의 기본이다. 또한 아이들에게 편안함과 따뜻함을 주기 위해 전략적으로 공간을 구성한다. 대기실 TV 화면에는 항상 만화가 상영되고 북카페, 영화관, PC룸도 있다. 아이들의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진료실은 최대한 아이들 대기실과 멀리 배치한다. 진료받다 소리 지르고 우는 아이들의 분위기가 대기실까지 전달되지 않도록 함이다. 어린이 전용 진료실에는 귀여운 캐릭터 침대가 설치되어 있고 특히 천장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가 나온다. 인체에 무해하고 약간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이산화질소 성분의 웃음가스 진정법은 어린이 치과 치료의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웃음가스를 아이가 코로 흡입하면 힘이 빠지고 나른해진다. 기분이 좋아진 아이가 까르륵 웃기도 한다고 해서 웃음가스로 불린다. 또한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는 치료를 해야 되는 경우에 '의식하진정법'이라는 수면치료를 권하기도 한다. 한 번에 몰아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임상경험이 풍부하고 안정성이 보장된 곳인지 철저히 따져 보아야 한다. 치과가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면 스트레스를 덜 받고 좀 더 수월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본인의 인생에 있어 치과에 대한 첫 기억이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이가 흔들리면 완전히 흔들려서 저절로 빠지기를 기다리던가 아니면 부모님의 도움을 빌려서 흔들리는 이에 다가 실을 묶어 확 잡아당겨 발치하였다. 뽑은 이는 보통 지붕 위로 던졌는데 요즘에는 치과에서 발치한 이를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와 기념으로 모으는 아이도 있고 첫 발치를 하는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일부러 사진을 찍는 부모들도 있다. 아들이 어릴 때, 첫 유치를 뽑으러 치과에 간 적이 있다. 직접 내가 아들을 위해 발치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치한 자리에 새 이가 덧나면 안 되고 혹시라도 발치 후에 출혈이 심하게 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실을 묶어서 이를 뽑기에는 비용 대비 효율성이 떨어졌다. 평소 주사 맞을 때도 잘 참던 아들의 얼굴에 긴장하는 빛이 감돌았다. 덩달아 나도 긴장하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들을 안심시켰고 발치하는 동안 간호사 선생님이 아들의 손을 꼭 잡아주셔서 어느새 아들은 웃고 있었다. 첫 치과 치료와 함께 좋은 추억이 아들의 마음에 쌓였다. 처음 치료의 기억이 좋아서 그런지 아들은 이가 아프면 감추지 않고 바로 아프다고 말한다. 조만간 치과를 가야 될 것 같다는 말도 망설임 없이 한다. 기꺼이 본인이 병원에 함께 가주겠다고 하면서 나에게도 병원 가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아프면 참지 말고 아프다'라고 말하라고 한다. 좋은 기억이 누군가의 삶에 긍정의 결과를 가져온다.




패배의식과 우울함은 상대방의 긍정적인 감정을 쉽게 무너뜨린다. 부모가 불안하면 아이도 덩달아 걱정하고 남편이 근심하면 아내는 더욱 염려한다. 불안과 근심은 빠르게 전염되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스며든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무서운 게 많다. 여름 폭염보다 에어컨 사용 때문에 전기세 폭탄을 맞을까 봐 두렵고 드를 무턱대고 긁어서 다음 달 청구서 보기가 무섭다. 환절기에 이불을 안 덮고 자는 아이가 감기 들까 걱정스럽고 부모님이 갑자기 아프시다고 연락이 올까 봐 무섭다. 특히 똑같이 먹어도 나만 살찌는 게 겁나고 지나간 것에 여전히 미련을 두는 내가 제일 무섭다. 무엇보다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함께 굳은 의지가 필요하다. 긍정적인 마음도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생각을 던져버리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 솔직하고 단순하게 노력해야 한다. 비록 나의 마음과 감정은 언제나 하루살이 신세고 어제의 좋았던 하루가 오늘 다시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지만 험한 세상 속에서 나를 응원해주는 모든 이들의 힘을 받아 내일은 덜 우울하면 좋겠다.

이전 06화 이런 걸 거래한다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