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제주는 특별했다. 2008년 남편과 제주도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 비행기가 제주 해안으로 진입 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푸르뎅뎅한 제주 땅이 브로콜리 밭처럼 생생하다.
그 후로 한참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내 인생의 절반이라고 한다면,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 닥쳤다. 당시 학업을 하고 있던 중에 회사에서는 상상도 못할 어려움이 펼쳐졌다. 어쩌다 보니 내 생황도 여러모로 난관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당시 학업면에서는 석사 마지막 학기와 병행해서 논문을 쓰고 있던 시기였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서투르고, 내 의사나 동기가 어떻든 간에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인 상황이었다.
이 시기 같이 의지했던 동료들은 회사를 나갔고, 나는 이것저것 신경 쓸 겨를 없이 외국어 강독 수업 준비를 몇 달 밤을 새워하고서도 핀잔을 들었고, 참신하다 못해 능력을 넘어선 논문 주제를 고른 덕분에 혹독한 심사를 받게 됐다. 무엇보다 내가 집중하고 싶은 일에 회사일로 방해를 받고, 회사 내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힘들었다. 솔직히 그만둬도 그만 이라고도 생각했지만,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이 시기를 견뎌내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공부를 방해하는 상황만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내가 믿는 하나님 말고는 의지할 수 없었던 상황들에서, 지난 시간 의지해온 것들을 다 제하고 오직 나 홀로 서는 법을 배우는 시간들이었다.
당시 한참 어린 동생이 지금은 제목도 기억하지 못하는 책에서 가져온 글귀를 보내주었는데, 모아둔 오랜 사진 파일에서 꺼내보았다.
모든 직관과 음성이 "힘들어도 그냥 이겨내야 해"였다는 것이 놀랍지만, 이후에는 어떤 일에도 크게 흔들림이 없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제주도에 있는 동종 업계에서 콜이 왔는데, 한번 해볼까?라고 물어왔고 나는 기다렸던 것처럼 "그래 너무 좋다. 어서 해보자"라고 부추겼다. 그렇게 주말 부부로 반 제주 생활이 시작됐다. 초반에는 석사논문을 마치고 나서는 나도 이 곳 생활을 싹 정리하고, 갈 수 있으리라 생각지만, 당장에는 논문 초고를 만들며 마지막 학기를 다니는 그 시기에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호텔 놀이를 하게 됐다(남편에게는 사택이 제공됐지만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고되긴 했지만 논문을 마치고 나니,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상황이 순조로와졌다.내 삶을 제주도로 통째로 옮길 꺼리가 없어진 것이었다
과업과 쉼을 분리한 제주살이
그 당시 발견한 제주에는 우윳빛 온천수가 나오는 숙소가 있었고, 비록 노트북에 책을 싸들고 가서 호텔 라이브러리에서 라이팅을 해대기도 했지만, 아침식사와 제주의 풍부한 해산물들, 푸른 바다와 푸른 산, 자연이 주는 그 평화란 너무 값진 것이었다.
@ 방주교회
노아의 방주를 콘셉트로 설계한 곳
제주가 이겨낸 힘든 시간만큼 곳곳에 교회가 많다.
이곳에서 동생과 남편과 셋이서 예배를 드린 기억이 지금도 종종 난다. 몇 번은 은혜에 감동돼 눈물을 주최하기 힘들었다.
지금도 서귀포에 들르게 되면 지금도 아침 산책 겸 나서는 방주교회다.
@ 더 아래로 가면 보이는 포도호텔
@ 여기는 공부하는 곳;; 남들 낮잠 한숨 청할 때 바삐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집중 모드 on상태
충전은 집으로부터
고향이 있는 사람은 한참 뒤 찾은 고향에 발을 디딜 때, 서울에 더 많은 시간과 적을 둔 사람은 여행 후 돌아오는 길에 서울의 정겨운 도로와 건물, 활기를 볼 때 안도감을 느낀다.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고 환경에 스스로를 무디게 만들고자 하는 충동이 있고* 나는 그것에 특화된 사람이다. 정말 해야 할 일이 난관으로 오더라도 그 환경마저도 장애가 되지 않게끔 설정해버리는 것 같다. 설령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또 엄청난 혜안을 가진 누군가는 집에 대한 장식과 설계에 대한 관심을 경멸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들에 만족하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나는 이 시기에 직관적으로 공간에 대한 필요, 공간에 대한 만족과 그것이 주는 시각적 평화와 안정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느꼈던 것 같다. 내 생활의 직장과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제주로 옮겼고 그 힘으로 인생의 난관을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더 함께 누리고 싶어 졌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과 지인들을 불러 머무르게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또 하나의 축복이었다.
* **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2013, 12- 13면.
한라산이 보이는 집을 얻다
이전에 지냈던 집에 답답함을 느꼈고, 산책할 거리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제주의 집은 비록 주말과 휴가를 내고서야 머무를 수 있었지만, 그곳은 나의 찾아가고픈 고향과 같은 집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 공항에 도착하면, 배웅하는 남편이 있었고 평일에 가는 날에는 나 혼자 제주도민 인양 시내버스를 타고 집이나 남편의 회사 근처로 가기도 했다.
20여분을 달리면, 함덕 해수욕장이다. 여름에는 다이소에서 구매한 파란 플라스틱 통과 채집망 하나로 게와 물고기, 새우를 잡고 놀 수 있었다. 물놀이를 하던 중에 파도에 떠밀려온 작은 열대어 같이 보이는 물고기를 모자로 올려내 건진 날에는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라도 제주에 가면 커피가 없어도 상관이 없을 때도 많거나 특정 브랜드의 커피 원두를 찾지도 않게 됐다. 가장 만만하고 좋은 것은 집 밖에 나가면 8시 전에 문을 여는 파리바게트의 카페 아다지오의 카푸치노면 충분했다.
서울에서는 주말이라도 어디 가서 뭐 먹지? 하다가도 교통체증 때문에 망설일 때가 많다. 제주도는 서울보다 한참 커다란 땅이다 보니, 사실 찾아간 곳이 엄청난 맛집이 아니어도 제철 해산물들로 충분히 맛있었고, 근처 바다를 눈에 담고 오면 더 이상 아쉬울 게 없는 곳이더라.
공간은 사람의 마음의 얼굴을 만든다
밤이면 바닷가에서 오징어잡이 배들이 반대편 하늘에 반사돼 그야말로 환한 하늘이 보였다. 밤하늘의 별을 보러 천문과학관을 찾아간 어느 날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성단 자리를 구분하게 된 것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한 감정을 선물해주었다.
나에게 이 시기에 쉼이란 어디 갈지 머리 안 써도 좋을 여행과도 같은 거였다. 제주도에 집이 있는 것은 비행시간이 있는 마지막 날까지도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집 밖으로 보이는 한라산과 석양이다.
아침의 경치, 자연을 마주한 사람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된다.
올라간 한라산의 모습은 딴 세상 같다고 해야 할까.
그해 겨울 제주에는 난데없이 큰 눈이 왔다. 한라산 중턱의 숙소에서 갇힐 뻔했지만, 기억에 남는다.
급작스런 눈에 노루도 놀란 모양이다.
산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
이렇게 사진을 올리다 보니, 다시금 그곳에 가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살이는 너무 젊거나 너무 연로해서도 잘 안 맞을 수 있다. 장, 단점이 그만큼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주의 자연은 급격한 비, 바람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옳지만, 그 밖에 것들, 특히 물가는 상당히 비싸고 의료시설도 서울과 다르다. 약국에서도 서울에서 흔히 취급하는 상비약을 찾기 어려웠다. 로망의 바닷가 옆에 집? 해풍에 생각만큼 좋지 않을 수 있다. 한옥집에도 퀴퀴한 냄새로 고생할 수도 있으니 합리적인 계획이 필요한 부분이다.
지난주 친구들 모임에서 우리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서울 아파트 값을 말하면서도 친구들은 분양받아 들어가기 전 얼마 간이라도 주택에서 살면 어떨까 하는 말들을 나눴다. 몇몇에게는 나와 동일하게 자연친화형이면서 인공친화형으로 매우 모순적인 소망이 있었다. 우리의 제주도의 집은 아파트였다. 정원에는 야자수가 자라고 있었고 작은 연못도 있으니 얼마나 자연적이고, 적당히 인공적인가. 아침저녁으로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다채롭게 들려오는 곳이었으니 그때의 단잠이 지금도 그립다.
@ 제주의 집에는 늘 귤이 있다. 이제 깨닫는 점 중에 하나는 같은 제주 귤이라도 바다를 건너서 서울로 오면, 줄기를 타고 열매로 흐르는 상큼한 귤즙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마치 쇠고기를 한번 냉동시켜 해동시킨 맛이라고나 할까. 아, 그리고 귤은 마음과 몸의 면역력에 좋다. 우리 가족이 일 년 동안 제주 귤을 먹는 순서는 이렇다. 한라봉(1-5월) - 황금향(추석) - 레드향(11월) - 천혜향(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