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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휴게소의 호두과자는 (못) 참지

-쫄보가 혼자 여행하는 법

by 알로하엘린


강릉에 갈 때면 홍천 휴게소를 주로 들르게 된다.

우리 집에서 강릉까지는 2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데 홍천 휴게소는 반 정도 왔다고 생각되는 곳에 위치해 있는 데다 그즈음이 되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또 휴게소 뒤편으로 풍경이 예쁘기도 하거니와 다음 휴게소인 내린천 휴게소는 양방향 휴게소인지라 잘못하면 어렵게 달려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불상사가 (내게는 충분히)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홍천 휴게소를 이용하곤 한다.


"어디쯤이야?"

요샌 일이 바빠 회사에 있을 땐 연락 두절인 남편이 잘 가고 있나 확인차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 홍천 휴게소.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 많네"

평일이라고 한적하고 그런 건 요샌 별로 없는 것 같다.

평일엔 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는 넘치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든 있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휴게소 뒤쪽 풍경을 잠시 감상한 후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하고, 호두과자를 살까 말까 고민한다.

나는 갓 구워진 호두과자를 매우 좋아한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고 팥은 뜨겁고 호두는 고소하니까!

아메리카노랑 궁합도 최상급인데... 그런데 왜 때문에 살까 말까를 고민을 하고 있느냐 하면.

이제 한 시간 정도만 더 가면 강릉에 도착할 테고 도착하면 바로 엄지네 포장마차로 달려가 꼬막 비빔밥을 먹을 계획인데(이번 여행의 중대 일정 중의 하나이다), 호두과자로 괜히 배를 채웠다가 꼬막 비빔밥을 덜 맛있게 먹게 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내 사전에 맛없게 먹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더 맛있게냐 조금 덜 맛있게냐의 차이일 뿐... 나는 그만큼 지금 꼬막 비빔밥에 진심인 것이다.


종종 굳이 안 해도 될 걱정이나 고민들은 왜 하게 되는 것일까?

좀 더 쿨해지자고 다짐해도 다시금 작은 것들에 연연하는 나를 발견할 때, 이것은 타고난 성격이라 바뀔 수 없고 이 성격을 바꿀 수 없다면 이 성격으로 말미암아 흘러가는 내 운명도 거스를 수 없겠지. 결국 이것이 팔자라는 것인가...? 의식의 흐름이 이렇게 황당하게 확장되어 가는 때도 있다.

주로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할 때.




20대에는 내가 쿨한 줄 알았다. 진심으로.

쿨하다는 말을 좋아했고 실제로도 겉으로는 쿨병에 걸려 있었다. 대범함과 단순함을 내포하는 것 같은 그 형용사가 마음에 들었다. 뭔가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무심하면서도 시크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가 좋았다.


쿨하다: 꾸물거리거나 답답하지 않고 거슬리는 것 없이 시원시원하다.


지금은 내가 상당히 소심하고 예민한 구석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 귀차니즘과 건망증을 쿨함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나는 주/객관적 평가로 심한 귀차니스트이자 중증도 이상의 건망증 보유자이다. 복잡한 걸 싫어하고 잘 까먹고 대체적으로 무관심한데 그것이 내가 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마고치 키운 적 없고 키우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음.

-집에 혼자 있어도 전혀 외롭지 않으며, 울다가도 바로 잠듦.

-남들한테 별 관심이 없고 뉴스가 전설이 돼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음.

-똑같은 책을 두 번 세 번 사거나 어제 싸운 친구한테 오늘 먼저 인사해 버리고, 걱정이나 미움은 곧 흐려져버림(물론 계획이나 다짐도 마찬가지).

-일찍 일어나는 게 싫어서 집에서 도보로 5분인 곳에 3전 4기로 취업함.

-결혼하고는 대중교통을 갈아타고 출근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울면서 고속도로를 내달림(관용적 표현이 아니고 왕초보라 진짜로 울면서 달림).

※ 이 밖에도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많으나 나의 건망증으로 기억나지 않음 주의.



이제는 쿨함과 귀차니즘, 건망증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안다.

그나마 자기 객관화가 되고 있는 현재 시점으로 나는 다혈질인데 소심한 귀차니스트이자, 극적 감정이나 사건 몇 가지만 기억하는 중증 건망증 보유자이다.


남편은 언젠가 진지하게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아니면 기억이 안 나는 척하는 거야?"


결국 호두과자를 포기하고 다시 차를 달린다. 정체 모를 뿌듯함과 함께 이제 온 만큼의 시간만 가면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로 창밖의 풍경들도 명도와 채도가 한껏 높아진다. 물론 도착해서 내가 처음 갈 곳은 바다가 아닌 엄지네 포장마차이지만 말이다.


반절을 넘어가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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