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확실성
세상을 추상적 모델들의 연쇄로 보는 시선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인식이 몸으로 파고드는 순간, 감각은 달라진다. 눈앞에 놓인 사물들이 갑자기 낯설게 보이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 또렷해진다. 세상이 비어 있고, 살아 있는 건 오직 나뿐인 것 같은 소외감이 밀려든다.
이 감각은 철학의 역사에서도 반복되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극한의 회의 끝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얻었다. 그 길 위에서 그는 세상 전체가 환영일 수 있다는 극심한 고독을 통과해야 했다. 그는 세상 모든 모델을 지워버린 자리에서, 오직 ‘생각하는 나’만을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과 세계가 맹목적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에게 세계는 무의미한 추상의 흐름에 불과했고,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거의 없었다. 사르트르도 비슷했다. 그는 인간이 본질 없는 존재로 태어나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본질의 부재 앞에서 인간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버려진 듯한 소외를 경험한다.
이 철학자들의 사유가 보여주듯, 세상이 모델일 뿐이라고 느끼는 순간의 소외감은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허상처럼 보일 때조차, 확실한 것은 살아 있는 나 자신이다. 젤리의 단맛, 의자의 감각, 지금의 호흡—추상은 본질을 담지 못하지만, 나의 생은 추상 너머에서 분명히 감각된다.
따라서 소외는 단순히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나만 살아 있다”는 고통스러운 자각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는 나의 현실성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계기다. 세상이 추상적 모델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자신이 유일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확인에서, 새로운 창조와 의미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생각번호2025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