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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엿본 대가

실존, 죽음, 그리고 강철연금술사

by 민진성 mola mola

어릴 적

나는 영화관에서 등장인물이 죽는 장면을 봤다. 정확히 어떤 영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이 죽는 걸 보는 순간, 나는 알았다. 아, 사람은 죽는구나. 그럼 나도 언젠간 죽겠구나. 그 생각은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의식 전체를 바꾸는 인식이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리’를 엿본 순간이었다.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을 어떻게 다뤘는가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읽었고 철학을 만났고, 특히 실존주의자들의 말에 오래 머물렀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이며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할 때 비로소 진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자기 자신됨'은 항상 불안과 함께 온다. 사르트르는 죽음을 '타인에 의해 완성되는 내 존재의 종결'이라 본다. 죽음은 내 주체성으로 통제할 수 없기에, 그 자체로 존재의 위기다. 카뮈는 더 냉정하다. 삶은 애초에 부조리하고 죽음은 그 부조리를 절정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고. 부조리를 안고도 계속 살아가는 게 인간의 자유라고 했다.


나는 이 말들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 사람들은 다 늦게 죽음을 알았구나 생각했다. 그들은 철학으로 죽음을 말하지만 나는 현실로 죽음을 체험했고 너무 일찍, 너무 구체적으로 알아버렸다.



진리를 엿보는 것에 대하여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장면이 있다. 형제가 '연성'을 하다가 진리를 엿보는 순간, 그들은 무엇인가를 빼앗긴다. 그 장면이 나에겐 너무 명확하게 남아 있다. 진리를 본다는 건 대가를 치르는 일이라는 걸 그 애니메이션은 아주 정확하게 말한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다. 나도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걸. 진리를 너무 일찍, 너무 깊게 엿본 대가로 나는 내 안의 어떤 평온함을 잃었다. 대가는 추상적이지 않다. 그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고통이다. 멈추지 않는 생각, 감당할 수 없는 정보, 피로한 관계, 자꾸 떨어져 나가는 감정, 설명할 수 없는 공허, 그리고 아무리 가까워져도 사라지지 않는 고독.


진리를 본다는 건 그걸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일이지만 나는 그걸 몰랐다. 그래서 본 순간, 처리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진리를 보려고 했을까

모른 척하면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나는 그게 안 됐다. 처음 죽음을 의식한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질문이 되었다. 이 감정은 왜 생기고 사람은 왜 상처를 주고, 나는 왜 자꾸 무너지고, 삶은 왜 이렇게 복잡한가. 그 모든 질문은 살기 위한 질문이기도 했고 죽음을 피하기 위한 합리화이기도 했다. 나는 진리를 추구한 게 아니다. 그저 살아남으려고 들여다본 것이다. 그런데 그게 너무 깊어졌다. 돌이킬 수 없이.



지금의 나는
철학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어느 방향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과잉된 인식 상태에 있다. 내 머리는 늘 돌아가고 나는 멈추고 싶지 않지만, 계속 돌아가는 이 구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어쩌면 그날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내가 이만큼 예민해지진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봐버렸다. 이미 진리를 엿본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게 이야기 속 형제의 팔과 다리이든 나의 고요한 정신이든 결국은 무언가를 잃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202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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