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반대 시위와 정의의 딜레마
서울의 어느 대학이 기숙사 신축 계획을 발표한다. 그러자 인근 원룸 건물주들과 임대업자들이 거리로 나선다. ‘생존권을 지켜달라’, ‘지역 경제를 파괴하지 마라’, ‘임대업자 죽이기 그만하라’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기숙사 건립은 결국 보류된다. 이 장면은 한국 대학가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신촌, 안암, 흑석, 상도동… 어느 대학이든 기숙사를 짓고자 할 때, 그 앞엔 어김없이 ‘이미 기숙사 역할을 해온 민간 임대업자’의 반대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정말 ‘양쪽 다 생존의 문제’일까? 혹은, 그 생존이라는 말 속에 감춰진 권력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물론, 임대업자들의 시위는 법적으로는 권리 행사로 보장된다. 그들도 자신의 생계 기반이 흔들릴 것이라 우려할 수 있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재산권 보호는 헌법상 기본권이다. 하지만 문제는, “권리 행사인 동시에, 그것이 윤리적으로도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법적 정당성과 윤리적 정당성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허용되는가?"를 묻지만, 후자는 "마땅한가?"를 묻는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란 단순히 개인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무엇을 귀하게 여길지를 함께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기숙사는 무엇을 위한 공간인가? 청년에게 안정된 거주지를 제공하기 위한 공공성의 공간, 부모로부터 막 독립한 학생들의 삶의 기반, 대학이 교육기관으로서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하는 방법.
그렇다면, 이 공간의 확장을 막는 것이 공공의 가치보다 사익(私益)을 앞세우는 일은 아닌가?
임대업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생존권’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생존은 수십 채의 방을 임대하는 사업자로서의 이익 보존에 가깝다. 반면, 기숙사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의 생존은 단 한 평의 방이라도 안정적으로 살아볼 권리, 월세로 가계가 무너지지 않을 최소한의 안전망을 말한다. 이 두 ‘생존’은 과연 동등한 무게를 가지는가?
대학은 공적 교육기관이다. 학생들의 학습과 생활의 기본 조건을 마련하는 것은 대학의 책무다. 그 책무를 사적 이익을 이유로 막는 행위, 그것을 사회가 묵인할 수 있을까? 기숙사 신축은 대학의 혜택이 아니라, 청년 복지의 기초다. 그것을 가로막는 행동은 공공의 구조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 이것이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샌델의 논리는 언제나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정의는, 가장 절실한 이들에게 먼저 도달해야 한다.” 기숙사를 기다리는 청년들, 쥐죽은 듯 불편한 월세방에서 살아가는 학생들, 밤늦게 학교까지 한 시간 넘게 통학하는 지방 출신 학생들… 이들에게 ‘공간’은 생존이다. 기숙사는 그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우리는 종종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이 피해자처럼 보이는 착시에 빠진다. 그러나 정의는, 소리의 크기로 가늠되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 존재하는 절실함을 얼마나 알아보는가로 결정된다. 기숙사는 특권이 아니다. 공공의 의무이고, 침묵 속에서 권리를 기다리는 이들을 위한 사회의 응답이어야 한다. 이제 그 앞에 서 있는 ‘반대’라는 현수막을, 다시 읽어야 할 때다.
#2025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