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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선생님.

by 원쌤 Mar 15. 2025


중국 청도에 있는 한국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입학식 날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1학년 꼬맹이들 틈에 유난히 몸집이 작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정훈이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행동은 몹시 산만했다.

식이 시작되자마자 제자리를 벗어나 돌아다녔고 데려다 놓면 어느새 다시 빠져나가 옆 반 줄사이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이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줄을 흩뜨려 놓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자기 운동화의 끈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계속 잡아당기자양쪽으로 동그랗게 묶여있던 끈의 고리가 단단하게 매듭지어졌다.

움직이지 않는 운동화 끈에 흥미를 잃은 정훈이는 발로 흙장난을 시작했다. 질퍽한 운동장 바닥을 신발로 하염없이 문지르더니 아직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운동장에 철퍼덕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갓 입학한 아이들에게 학교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나 습관들을 가르치면서 오후까지 수업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조잘대고 싸워댔으며 서로서로 고자질하느라 교실 안은 늘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정훈이는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도 힐끗 한 번 쳐다보면 그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행동은 너무나 민첩해서 툭하면 귀신같이 사라지곤 했다.


학교는 원래 리조트로 건축된 건물이었다. 학생수에 비해 건물 규모는 너무 컸고 군데군데 미로 같은 복도가 있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3월 한 달 동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정훈이를 찾아 학교 안 구석구석을 헤매는 일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유명해진 정훈이는 2층이나 3층의 교실과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상급생들의 손에 끌려오곤 했다.


수업 시간에는 자리에 앉아 있는 적이 거의 없었다. 끊임없이 교실 안을 빙글빙글 돌았고, 친구들의 물건을 밟거나 집어던지고 게시판을 망가뜨렸다. 그래도 눈치는 빨라서 자신이 잘못했을 때에는 미안한 표정으로 잠깐이나마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고, 친구들을 화나게 했을 때에는 즉시 사과도 했다.

 물론 입은 다문 채 손으로 상대방의 어깨나 팔을 쓰다듬는 정도였지만.


그런 정훈이가 가끔 모래밭에서 놀다가 친구들에게 모래를 뿌리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도 쳤으나 잊을만하면 한 번씩 그런 행동을 해서 때로는 교실로 데려와서 남은 시간 동안 앞에 나와 벌을 서도록 했다.

그건 아이들에게는 가장 심한 벌이었으나 정훈이의 나쁜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어느 날 이번에는 3학년 남자아이가 피해를 당했다.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내게 달려왔고 난 또 나가서 정훈이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정훈아 형한테 왜 모래 뿌렸어?”  

“..........”

“형한테 사과해”  

정훈이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도리질을 했다.

“사과 안 할 거야? 정훈이 선생님한테 혼나야겠다.”

하지만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전 같으면 얼른 사과를 할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고집을 부렸다.

“안 되겠다 정훈이, 교실로 들어가.”

그때 옆에 서 있던 여자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저 오빠가 정훈이한테 '살인마 새끼'라고 했어요.”

“뭐?”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간신히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너.... .... 얘가 왜....”

아이들은 평상시와 다르게 허둥대는 나를 불안스레 쳐다봤다.

나는 눈물이 쏟아져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훈이는 다운증후군이었다.

그동안 정훈이가 왜 자꾸 친구들에게 모래를 뿌렸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겉모습이 자기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한 말과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나 내막도  모른 채 말 못 하는 아이를 야단친 나나 다를 것이 없었다.

정훈이가 모래를 이유 없이 뿌리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들이 알게 되면서 교실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날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선생님, 정훈이 가요....."  하던 소리가 점점 사라졌다.

그리고 바깥놀이를 할 때면 몇몇 여자아이들이 정훈이를 동생처럼 살뜰히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훈이는 따뜻한 친구들 곁으로 점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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