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천적으로 봄을 좋아할 수 없는 체질이다. 날리는 꽃가루에 비염이 도지고 부는 바람에 피부는 가렵고 몰려오는 황사에 눈에는 결막염이 오기 일쑤이니 그저 어서 지나가기만 바라는 축이다.
하지만 가을은 좀 다르다. 우선 모기가 사라진 서늘한 밤이 좋고 더욱 맑게 전달되는 벗의 음성과 함께하는 술은 맛이 더욱 깊다. 시나브로 겨울로 향하는 원치 않는 발걸음은 순간순간을 안타깝게 한다.
틀림없이 내가 무식한 탓이겠지만 가을을 노래한 시는 그렇게 많이 만나보질 못했다. 그러던 중 출근길 전철 안에서 모처럼 가을을 노래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좋아 흥분된 마음이 가신 후 차분히 읽어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들어있는 멋진 가을 노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온 세상에 서릿발 날리고
온 산 나무 낙엽 지는데,
싸늘한 고운 단풍은 봄꽃의 시샘 사지 않는다.(1)
집 서쪽 단지에는 늙은 라일락이 몇 그루 있다. 봄밤에 술 취해 흔들며 걷다가 녀석들의 향기를 처음 맡았을 때 우뚝 서서 한참 쳐다보던 친구들이다. 심장처럼 생긴 나뭇잎이 밤새 무척 추었는지 구부정하고 언뜻언뜻 붉게 변해가는 나뭇잎이 중늙은이 새치 같아 짠하다.
흐르는 물 외로운 마을 감도는데
꽃이 만발한 것 같은,
향기로운 단풍 든 나무에 저녁 해 비껴있다.(2)
‘만발’이라는 형용사는 봄에만 쓰는 것일까? 집 건너편 화단은 누구의 솜씨인지 계절마다 그 변화가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이른 봄에 도도한 동백이 광화문 충무공 동상처럼 군림하는 것을 시작으로 현란한 여름을 보내다 가을에 와서는 작은 크기의 꽃들을 한꺼번에 피워낸다. 하지만 봄꽃과 달리 이 녀석들은 매우 작다. 목련이나 동백은 툭툭 그 큰 꽃을 떨구고 버찌 꽃은 비 오듯 꽃잎을 온통 날리며 가지를 떠나지만 가을꽃은 그 자리에서 가는 숨을 쉼을 줄이며 시들어 간다. 하지만 피어있는 시간은 봄꽃에 비할 바 없이 길다.
노쇠한 얼굴 보이기 부끄러워 술 빌어 얼굴 붉히고,
그처럼 낙엽 지고 있는가?(3)
아침에 집을 나와 출근할 때는 길 남쪽엔 가을꽃이 가득 피어있고 길 북쪽엔 라일락이 그래도 푸른빛이다. 그 위로 쏟아지는 햇볕 알갱이들을 보며 희망을 생각하며 걷는다. 하지만 사람이나 옷이나 후줄근해 돌아오는 밤 귀갓길엔 희망은 같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얼근해 몽롱한 걸음을 옮기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않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못할 터인데, 그건 라일락도 그렇고 저 꽃들도 그러할 것이다.
파랗게 녹음 우거졌던 강남땅 생각하며
밤 창 앞에서 어둠 속에 내리는 빗소리 듣는다.(4)
집 거실엔 동쪽으로 큰 창이 있어 하늘을 보기에 더없이 좋다.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비가 듣는 날에는 소리 없이 창에 빗방울이 엉기고 멀리 불 빛 사이로 빗발이 희미하다.
정은 싣고 가지 못하고 시름만 싣고 간다.(5)
오늘 퇴근길에는 그저 한번 쓰다듬고 지날 생각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가을이 흐르고 삶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 같다.
** 대문 사진 설명.
출근길 골목 모습이다. 오른쪽은 라일락 나무들이고 왼쪽엔 가을 들 꽃이 가득이다.
** 위에 인용한 문장은 송(宋) 나라 장염(張炎)이라는 사람의 사(詞)이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해석은 김학주(1989)를 따랐다. 인용한 부분은 밑줄을 치고 번호를 매겨 표시했다.
万里霜飞, 千山木落, 寒艳不招春妒。(1)
枫冷吴江, 独客又吟愁句。
正船舣, 流水孤村, 似花绕, 斜阳芳树。(2)
甚荒沟一片凄凉, 戴情不去带愁去。(5)
长安谁问倦旅?
羞见衰颜借酒,飘零如?(3)
谩倚新妆, 不入洛阳花谱。
为回风, 起舞尊前, 尽化作, 断霞千缕。
记阴阴绿遍江南, 夜窗听暗雨。(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