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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와 생존을배우다.

캐나다 첫직장에 에서배운 것

by 개양이 CATOG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매우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게 되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던 일이 당장 먹고사는 일 앞에서 그렇게 하찮아보일수가 없더라. 한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아남는 일은 당장 내야 할 렌트비, 식비를 버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는 일이었고, 그림처럼 긴 호흡이 필요한 일이 나에게 너무 사치스러운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던 그림 그리기는,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 질문을 더 이상 막아내기가 너무 버거워졌다.


" 그림 그려서 뭐 먹고 살 건데?"

" 빈센트 반 고흐처럼 귀를 자를 거니?"

" 굶어 죽을 거니?"

"불행하게 살 꺼니?"

"죽어서 유명해질 거니?"


어느 순간, 세상에 참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많은데,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이 세상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꺼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내 입에 밥을 집어넣는 일보다 더 대단한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눈 앞에 닥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사촌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캐나다 생활을 하며 깨달은 것은 이곳에서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는 상황에 대한 인지였다. 과거에 어떤 대단한 일을 했던 이민자라면 새로운 땅에서 캐나다인으로써의 경험과 교육을 가지고 있어야 이곳에서 내가 그전에 일하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곳에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도 아니었고 여차하면 영어 공부하고 돌아가야지라고 가볍게 시작했지만, 어느샌가 나는 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가르치고 어학 공부를 하고, 골똘히 고민 끝에 토론토 내 있는 OCAD 예술 대학교 디자인과에 편입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이 시기에 나는 스스로 아무 쓸모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노력을 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일단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 했고, 내가 큰 언니니까 스무 살이 되기 전인 동생과 함께 대학교를 함께 다닐 수 있는 집을 토론토에서 먼저 구해놓아야, 함께 살 어떤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홈스테이에 머물며, 함께 살 집을 렌트비를 내기 위해 초밥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구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아이들을 위한 페이스페인팅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최선'을 '같이'하는 방법을 배우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일해보지 않았던 식당 일이라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 토론토 내에 있었던 초밥집은 선한 한국계 캐나다인 부부가 운영하는 조그맣지만 따뜻한 초밥집이었다. 인터뷰를 보는 첫날,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나는 너무 긴장했지만, 사장님은 '응? 생각보다 영어 잘하는데?'라고 해주시면서 상대적으로 한가한 편인 점심 타임 웨이트리스부터 시작하면 차근차근히 일을 배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초밥 스테이션, 키친 스테이션에 주문 넣는 방법, 기억해야 할 재료, 손님에게 주문을 받는 방법 등을 교육받고, 주방에 주문 넣을 때는 한국어로, 손님 응대는 영어로 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토론토 시내에서의 첫 직업이었기에, 집으로 돌아와 마치 시험공부를 하듯, 메뉴를 외웠다. 가뭄에 단비 같았던 초밥집 식구들과 좋은 관계로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일하면서 내가 초밥을 그리고 초밥집주인이었던 Jen언니와 글씨를 쓰며 함께 완성했던 메뉴판은 여전히 잘 사용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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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함을 참지 말고 품위 있게 No라고 말하기

다행히 선임 복도 있었다. 먼저 일하고 있었던 모두들 일 잘하기로 입을 모았던 그녀는 뮤지컬 배우라는 그녀의 직업 적성을 살려 마치 대사를 줄줄 외우듯 초밥집 메뉴판을 외우고 주방과 초밥 스테이션에 주문을 넣었다. 참, 그 언니는 나에게 전화를 받는 것도 훈련시켜주었다. 사실, 익숙지 않은 언어로 전화를 하기란 여간 긴장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망설였지만 가족 같이 따뜻한 초밥집 식구들의 지지로 첫 전화 주문도 무사히 받았다. 그녀는 매력적으로 무례한 사람에 대처하는데 능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환경은 때론 영화 촬영장처럼 전쟁통 같이 바쁜 상황에서 협업을 요하는 상황이 많다. 그러다 보면 가끔 무례하게 대하는 손님이나 일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많은데 그녀는 자신에게 부당하게 일을 전가했던 키친 스테프에게


' No, this is not my job. This is your job. Thank you.'

'아니요. 이건 제 일이 아니에요. 당신 일이에요. 고마워요.'


라고 단호하고 예의 있게, 그러나 품위를 지키면서 말할 줄 아는 멋진 여성이었다. 한국에서 일하는 환경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에게 그녀는 분명 좋은 롤 모델이 되어주었다.


위기 상황은 유머로 대처하기

식당일에 그래도 꽤나 잘 적응을 하고 있었지만 물론 사람이니 실수를 하기도 했다. 거대한 '배'모양 접시에 초밥 세트를 손님 테이블에 옮겨야 했었는데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초밥 접시를 너무 가장자리에 놓은 나머지 초밥 접시가 떨어진 것!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다 손님 앞에서 초밥 접시를 온몸으로 안은 적이 있다. 물론 나는 초밥 이불을 덮은 것 마냥 온몸이 초밥으로 덮였다.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서

"I'm sorry I think I was hungry."

"미안해요 배고파서 그랬어요."

라고 말하고 상황을 수습했다. 손님들은 웃어넘겼고(물론 팁을 주지는 않았지만 - 역시 캐나다 사람들은 친절하지만 매사에 정확하다.) 사장님에게 맛있는 초밥 두 조각을 얻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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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캐나다에서 밥벌이를 '잘'하는 중요한 방법은 이 곳에서 배웠다.

여전히, 좋은 일이 생기거나, 나의 처음을 기억하고 싶을 때, 이곳에 들러서 초밥을 먹곤 한다.

여전히 따뜻한 첫 직장의 기억은, 앞으로 만날 많은 일들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You will be missed."

"우리 모두 널 보고 싶을 거야."

"You are always part of Osaka family."

너는 항상 오사카 패밀리의 일원이야.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이 곳을 방문해도 이 곳에서 스시를 먹으며 이 말을 듣고 나면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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