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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오라기 Dec 14. 2020

병어돔과 북유럽 감성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외국어를 배울 때 의외로 고유명사가 발목을 잡는다. 예를 들면 ‘마이크는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와 같은 문장을 영어로 말하라면 어떻게든 하겠는데 복어의 영어 이름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오답조차 말할 수 없다. 아무래도 물고기 이름 같은 것은 우리가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 쓸 일도 많이 없으니까 그렇다. 미국에 가서 ‘복지리 중짜 주세요’라고 말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는가.

역시 같은 맥락에서 물고기 이름은 국어라도 어렵다. 내가 아는 것도 연어니 광어니 하는 먹어서 접한 물고기 정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상 위에 올라온 ‘생선’의 모습으로 물고기를 처음 알게 된다. 내 입맛에는 최근 유행하는 북유럽 감성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노르웨이산 고등어조림이 제일인데 흰살 생선 중에는 도미를 최상위급으로 친단다.

도미는 회는 당연하고 어떻게 요리해도 맛있어서 고급 생선에 속한다. 사실 도미라는 생선은 없고 ‘도미과’ 안에 참돔, 감성돔, 붉돔, 황돔 등이 포함된다. 이 때문에 생선에 일단 돔 자가 붙으면 몸값이 올라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최근에 등장한 물고기가 ‘사칭돔’이다. 사실 수산시장 가서 ‘이건 비싸요’라는 대답을 듣는 돌돔도 우럭에 속하지 도미과는 아니다. 우럭도 꽤 맛있기 때문에 돌돔까지는 한 번쯤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요즘 나오기 시작한 자리돔이니 따돔이니 흑돔, 역돔, 옥돔 운운하는 어종들이다.

특히 고급 일식집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병어돔’은 혼종에 혼종을 거듭해 탄생한 근본 없는 물고기라고 한다.

전문가 분들에 따르면 병어돔이라는 물고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병어라는 물고기 자체가 맛이 좋아서 인기가 많은데, 그러다 보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생긴 게 비슷하면서 대량으로 양식이 가능한 어종이 해외에서 유입돼 ‘수입산 병어’로 둔갑해 비싸게 팔린단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게 또 귤과 오렌지의 차이처럼 묘하게 다른 데가 있어서 업자들이 이제는 가짜 병어를 병어보다 더 맛있는 ‘병어돔’이라며 웃돈을 얹어 팔고 있는 상황이 됐다.

일단 ‘돔’이라고 하면 맛있어 보이고, 좀 비싸도 될 것 같고, 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의 속살까지 낱낱이는 알아볼 수 없다 보니 오늘날의 천사채 위에는 돔인듯 돔 아닌 돔 같은 가짜 생선들이 척척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했다. 참숯과 번개탄이 그랬고 뼈에 다른 고기를 붙여 만든 갈비탕이 그랬고 원유를 넣지 않은 우유가 그랬다. 사실, 이들보다 악의는 덜하지만 요즘 한층 더 심해진 ‘북유럽 감성’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에 이케아가 막 진출하기 직전에 유행하던 스칸디나비아 인테리어를 기점으로 북유럽 감성의 그 무언가가 들불처럼 번졌다. 북유럽 가구, 북유럽 디자인, 북유럽 음식, 북유럽 변기커버와 쓰레기통도 있다(진짜로).


최근 한국인들의 북유럽 사랑은 코로나19에 따른 해외이동 제한과 함께 사그라든 느낌이다. 그 대신 이제는 무엇이 북유럽인지 무엇이 진짜 도미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사전적인 북유럽이라 하면 말 그대로 유럽 대륙 가운데 북쪽에 있는 나라들을 일컫겠고 스페인과 스웨덴의 차이도 어쩐지 적당히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것저것 너무 늘어나버리고 나니 오늘날 한국에서 통하는 북유럽 감성의 그 북유럽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보라고 하면 참 어렵다.


 비싼 돔 싸게 준다는 사장님 말만 믿고 가짜 생선을 먹는 것처럼, 북유럽 유행인지 서유럽 유행인지 모르겠는 적당히 세련된 메이드 인 차이나 가구를 할인 쿠폰을 써서 원가보다 비싸게 사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말끝을 잡아 보자면 정의라는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가 싶기도 하다. 아메리카노가 왜 그런 이름이 됐는지 몰라도 짜장면 먹고 나서 한 잔씩 마셔주면 세상 맛있는 건 똑같지 않나. 수많은 북유럽 가구들과 소품도 그렇다. 실제로 북유럽에서 그런 걸 입고 쓰는지는 몰라도 내 눈에 예뻐 보이고 사서 거실에 펼쳐 놨더니 잘 어울리면 그만 아닐까. 북유럽과 서유럽의 경계선을 나누고 북유럽 감성의 근원을 찾아 나를 맞추는 것보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형성된 나의 취향에 맞춘 소비가 더 행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병어돔이나 ‘북유럽 호텔식 때타올’과 같은 기이한 혼종을 볼 때 느끼는 불편함 또한 존중받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성의 관대함은 물과 같아서 모든 것을 수용하지만 그 와중에 무언가는 자취를 감추고, 잔바람에 쉽게 휩쓸리기도 한다. 유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비웃을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석에 숨겨진 얄팍한 지식으로 꼼수를 부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SNS 인증샷’을 위해 수많은 가짜 돔 생선을 비싸게 사 먹는 사람들을 비판하기보다, 그런 유행을 만들어낸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은 심정이다. 진정한 북유럽 트렌드의 선도주자인 노르웨이산 고등어처럼, 원산지를 속이지 않아도 구이로 찌개로 조림으로 널리 사랑받는 고등어처럼 당당해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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