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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오라기 Jan 12. 2021

소와 말이 행복한 사회

소는 죽었고 말은 살아간다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말이 있다. 소는 살고 말은 죽는다는 뜻인데 대부분의 사자성어가 그렇듯이 글자만 봐서는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놨기 때문에 유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소와 말은 둘다 네 발 달린 초식동물 가축이지만 소는 느리고 힘이 세 농사일에 적합한 반면 말은 발이 빠르고 날렵해 이동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때문에 물에 빠지면 소보다는 말이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홍수가 났을 때는 상황이 정반대가 된다. 말은 빠르고 불규칙적인 물살에서 탈출하기 위해 허우적대다가 힘이 빠져 죽는 경우가 많고, 소는 물살에 몸을 맡겨 흘러가다가 안전한 곳까지 밀려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비가 참 많이도 왔던 때 섬진강에서 발생한 호수를 피해 소들이 부서진 지붕 위에 올라가거나 산기슭 절까지 피난을 갔었던 사연을 떠올려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우생마사’는 단순히 소와 말의 습성을 설명한 단어일 뿐이지만 이 사자성어를 알게 된 사람들은 ‘느리더라도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면서 사는 소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는 교훈을 자연스레 도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실은 사자성어를 통해 깨달음을 주는 소보다는 말이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다. 1880년대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까지, 말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탈것이었다. 하지만 말을 먹이고 유지하는 데는 꽤 많은 비용이 들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을 가질 수 없었다. 심지어 마부도 말과 마차를 빌려서 영업을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회사의 승용차를 이용하는 택시운전사 같은 입장이었다.

물론 19세기 영국의 기록을 보면 하루 16시간동안 마차를 끌어야 하는 말들도 있었고, 눈가리개 등 말에게 고통을 주는 장비들이 마구잡이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말은 그 비싼 몸값으로 인해 늘 귀한 취급을 받았다. 성격이 예민해 다치기 쉬운데, 대형 가축이다 보니 한 번 부상을 당하면 회복이 힘들다는 점도 한몫 했다. 우수한 종자를 얻기 위해 교배와 임신, 출산까지의 모든 과정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몸을 빗겨줄 때도 말빗, 솔, 몸솔, 물솔, 갈기빗, 꼬리빗 등 다양한 도구가 있어야 한다.


소를 키우는 데도 물론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 너무 덥지 않고 춥지 않게, 영양과 질병 예방에 신경을 써 주고 사육장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곧 소를 좋은 고기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즉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인 것이다. 앞서 섬진강에서 큰 홍수를 피했던 소들도 구출되고 나서 제 주인에게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축됐다고 한다. ‘소는 살고 말은 죽는다’지만, 오늘에는 소는 죽고 말은 사는 모양새가 계속되고 있다.




말을 정성껏 기르는 목적은 말을 살리기 위해서인데 소를 정성껏 기르는 목적은 소를 죽이기 위해서이다. ‘소가 행복한 환경’이라는 말은 그래서 좀 허무하다. 녹차를 먹이든 완두콩을 먹이든 산삼을 먹이든 결국은 그러한 행동의 목적은 소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죽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위한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죽임이 아니라 살림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청년이 행복한 나라’라든지 ‘엄마가 행복한 도시’를 외치는 식상해 죽겠는 정책들은 종종 이 점을 간과해서 실패한다. 사실 그들은 청년이나 엄마나 노인이나 아이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그림 없는 퍼즐처럼 맞추기 복잡한 법인데 ‘학생’이나 ‘취준생’이나 ‘은퇴자’등의 표딱지가 붙고 나면 마치 단 한 가지의 욕망을 바라고 사는 것처럼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취준생을 위해서는 3개월짜리 비정규직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엄마를 위해서는 아이를 많이 낳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고,  노인을 위해서는 한달에 10만 원의 보조금을 주는 일차원적인 대책이 당장 뭔가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개개인의 어려움에 대해 별로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보니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고 마는가 보다.

소를 곧 죽을 존재라고 생각하면 농약이 듬뿍 뿌려진 풀을 먹든 겨울에 발이 시리든 말든 별로 관계가 없어진다. 배고프지 않게 먹이를 주고, 얼어죽지 않을 만큼의 축사를 제공하고, 중증의 질병으로 고기 질이 나빠지지 않을 만큼의 건강검진을 해주며 그럭저럭 살아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든 소든 그런 대우에 순응하면서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자며 설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비관하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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