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제본가 를리외르, 그대의 흰 문장

by 휘루 김신영

이 작품은 <시와 문화> 여름호에 특집으로 실렸다. 최근의 시 중에서 가장 공을 들인 작품이다.


좋은 시와

우리말을 살려 쓰는 문장과

따뜻한 감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예술제본가 를리외르, 그대의 흰 문장/김신영



무엇이 공방 앞에서 천년을 불사르게 하는지

내내 생각해 보아도 이 사로잠은

만 첩 어여쁜 나비 날개를

처참하게 내려앉은 너의 어깻죽지에

멋지고 아름답게 매달아 주는 일


흐린 기억에 햇살을 넣어주는 일이라고

어머니 백옥(伯玉)에 대고 천천히 말합니다

괜․찮․아․요 어머니, 이 일은 예․술․이․예․요

예술도 가끔 돈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잖아요

괜찮아요. 이젠 물구슬 찍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즘은 를리외르*도 밥은 먹고 다니거든요

예술 제본은 천 개의 진흙 알알이 벽돌집 짓는

어머니, 빛나는 비단옷 삼색제비 같아요

제비가 허룩한 봄날에 붉은 진흙을 물어

뾰족 입 모양을 아로새긴 집을 짓잖아요


천 번을 물어 허공을 나르면 제비집이 완성된다는데

만 자를 품어 책등을 지으면 책이 완성되겠지요

헌책을 새 책으로 만들어 읽는 사람마다

책날개가 활짝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거예요

다시 활자를 읽는 책거리에서 사랑을 만나고

골목 책방에서 벌써 멀리 가버린 이름도 만나겠지요


그렇게 책을 키우는 건 아홉이 구름이듯이

책갈피에 꽂힌 비표도 아홉이 바람

허공을 입가에 아로새기는 시간입니다


실꾸리에 연이은 책을 꿰는 굵은 손마디

금박으로 누른 캘리 활자, 반짝 별등이

우주를 운전하고 있어요


*를리외르 – 예술 제본가


시와 문화 2025 여름호-특집 이 시인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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