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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에스 Sep 08. 2021

불안한 엄마

나의 불안을 건드리는 꼬마아이가 있다.

“자, 엄마 손 잡고 가자~ 손 잡아!”

“아가~ 엄마랑 손 잡고 가야지?”

“어~ 어~ 야!!!!!!!!!!!! 손 잡으라고!!!”


  우리 모녀의 일상에서 아주 흔한 대화. 밖에만 나오면 고삐가 풀리는 4살 딸 아이. 호기심이 많고 모든게 궁금하고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라서 일단 '궁금하다' 입력이 되는 순간, 세상은 온전히 '궁금한 대상' 과 '자신'뿐이다. 엄마인 나조차 그 세상에 들어갈 수 없다. 

  주차장, 도로 옆을 걸을 때면 늘 신경이 곤두선다. 엄마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본 일이 거의 없다보니 늘 밖에 나오면 큰소리를 치게된다.



 나는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을만큼 걱정이 많고, 언제나 작은 일에도 흥분을 잘하는 불안한 사람이라서 스스로 멘탈을 조절하기 위해 수시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조된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손 잡기를 온 몸으로 거부하며 도망 다니는 아이 덕분에 외출하면 피곤해지기 일쑤인데, 얼마 전에는 대체 공휴일이라 친구랑 아이를 데리고 만났다. 숲 놀이터를 가기 위해서다. 장소를 이동하거나, 주차장에서 내려주기 전엔 '손 잘잡자, 안전하게 함께 다니자' 늘 다짐을 받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에서 내리면 마치 모터를 달아놓은 것처럼 제멋대로 방방 뛰어다녀서 쫓아가 세운 다음 주의를 주었지만 아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고 싶은대로 행동했다. 나는 화가 아주 많이 났고 차에 태운 후 아무도 모르게 듣지 않는 아이를 향해 모진말을 쏟아냈다. 나와 아이만 아는 나의 진짜 모습이 나오는 시간이다.



  사실 아이는 엄마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모진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것이다. 그저 궁금하고 하고싶은대로 했을 뿐이니까. 매일같이 주의를 주다보면 이런 강박이 있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고 그 상황자체가 싫어지다보니 아이한테 크게 화를 내는 것 같다.

  아이를 보지 못한 차가 달려올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기도 하기 때문에 언제나 아이의 행동을 예의주시 하게 되고, 몸은 늘 긴장상태라 외출에서 돌아오면 녹초가 되곤 했다. 그래서 아이랑 함께하는 외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쉬는날이면 꼭 아이에게 자연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좋은마음으로 나가곤 한다. 돌아올때는 셋이서 말한마디 없이 온 적도 많지만! 



  우리는 주로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정원이 있는 카페를 가거나, 공원에 가곤하는데, 한번씩은 '이제 좀 컸으니 괜찮겠지?' 하며 전시나 미술관을 갔다오고 나면 ‘내가 잠깐 미쳤구나!’ 하고 후회를 하곤 한다.

  실내 전시라던지, 꽤 오래 앉아서 있어야 하는 장소는 아이가 견뎌내지 못하기에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장소를 고르지만, 그런 공간이 많이 없기도 하고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는 갈 곳이 없는게 문제다. 더군다나 "코시국"에 사람들과 동선이 많이 겹치지 않는 곳을 간다는 것은.. 한번씩 나가서 실랑이를 하고 오면 한동안 외출을 하지 않는다.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한동안 멘탈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사실 벌을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늘 "안전하게 걸어가자, 안전하게 행동하자, 거기는 위험하니 내려오면 좋겠다..." 이런말을 하고 있는데 나도 제발 이런 말 좀 안하고 살고싶다. 우아한 육아는 바라지도 않지만, 언제나 뛰어다니느라 겨드랑이는 땀에 절어서 얼룩지고 , 이마와 등줄기에는 굵은 땀방울이 쏟아지고 표정은 일그러진다. 손 잡고 예쁘게 걸어가는 엄마와 아이들을 보면 너무 부럽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뛰어다니니까 아이지.'하면서 합리화를 해본다.


오늘 아침, 엄마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어요.




깜짝 놀란 나는 이리저리 흩어져 날아갔지요.

내 머리는 우주까지 날아갔고요,

내 몸은 바다에 떨어졌어요.

두 날개는 밀림에서 길을 잃었고요,

부리는 산꼭대기에 내려앉았어요.

꼬리는 거리 한가운데로 사라져 버렸지요.  


두 발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지만

곧 달리기 시작했어요.


나는 내 몸을 찾아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두 눈이 우주로 날아가 버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리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어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지요.      

.

.

.


바로 그때였어요.

엄마가 내 모든 걸 다시 모아 한데 꿰매고  있었어요.      


다 꿰매고 나서 엄마는 말했어요.

"아가야 미안해"


<고함쟁이 엄마 中>




이 날 집에 돌아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이를 상대로 참 우습지만 너무나 화가 난 내 자신이 한심하고 그 걱정의 순간들이 억울했다. 하지만 재우려 누우니 아이는 멍하게 누워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그렇게 애교많고 사랑스럽고 말도 많은 아이가 눈치를 보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


"아가, 엄마는 걱정이 좀 많아. 걱정은 계속 불안함을 만들지만, 엄마의 걱정은 사랑이야. 하지만 미안해, 엄마가 어른답지 못했어. 너무 부끄럽네..."


아이가 알아들었을까? 그냥 내 마음이라도 전하고 자야 나도 발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괜찮아요. 다음부터는 안그럴게요."


나는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많은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에야 잘 수 있었다. 

(물론 다음부터 안그러지는 않았다.........)



이번 해프닝을 통해 가만히 나를 들여다 보았다. '나의 불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몬테소리 교육을 꼭 해주어야지, 엄마표 미술놀이는 아이에게 정말 최고의 놀이가 되겠다, 절대 소리지르지 말고 때리지 말고 다정하게 말하고 우아하게 키워야지.' 이런 생각과 상상속에서 임신기간을 보냈는데,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그런 생각보다는 눈 앞에 있는 이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프면 어쩌지? 우유를 잘 못먹어서 어쩌지? 왜 빨리 뒤집기를 못하지?' 걷기 시작하니 '넘어지면 어쩌지? 다치면 어쩌지?' 너무 사랑해서 라고 하기엔 과할만큼 "행복"에서 "걱정"으로 시스템이 완전 바뀌어버린 것이다. 


  '엄마가 된다는 것'이 뭘까? 아이를 잘 키우는 것? 부족함 없이 지원해 주는 것? 대신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 모든것을 받아주고 포용해주는 마음을 갖는 것? 이번에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내 마음속의 아이가 점점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 




나는 오늘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어른이 되어가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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