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감은 아주 완고하기로 유명했다. 완고하기가 어느 정도냐면 자신이 농담으로 한 약속일지라도 그는 반드시 지켜야 했기에 작은 약속이라도 쉽사리 하지 않았고 가훈마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라'였다. 붓글씨로 크게 적힌 가훈은 액자에 담긴 채 안방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또 재산이 많기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스크루지 영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재산을 쓰는 일이 없었고 자식들에게도 원하는 학력까지만 지원을 해주고 그 이상의 금전적 지원은 일절 없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교육을 시켜 주었으니 이다음부터는 너희들이 알아서 살거라."
자식들의 출가를 재촉하며 내뱉은 한마디였다.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금전적으로 도움받기를 원하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재산 받을 생각 말고 알아서들 살거라."
늘상 이와 같이 잘라 말하고 돌아누워 쳐다보지도 않았다.
박영감의 큰 아들은 의사였고 현재는 자기 이름을 걸고 작게나마 의원을 내서 운영 중이었다. 큰아들 스스로 해낸 일이었기에 박영감은 늘 기특하게 생각했다. 자기 밥벌이를 스스로 해내는 것이 자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문제는 둘째 아들이었다. 둘째 아들은 뭘 할 생각이 없어 보이기에 진지하게 얘기라도 꺼내볼 참이 되면 넌지시 묻곤 했다.
"앞으로 뭐할 건지 계획은 있느냐?"
"아, 아버지 제가 알아서 할거니께 그만 좀 하세요. 아버지한테 손 안 벌릴 테니 두고 보셔요."
몇 번이고 사업을 해보려고 시도했던 둘째 아들은 박영감에게 대놓고 손을 벌릴 순 없고 만날 때마다 은근히 금전적으로 지원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둘째 아들의 그런 낌새를 짐작하고도 남는 박영감은 그럴 때마다 요즘 날씨가 어떻다느니, 마당에 새가 날아 들어와서 마당에서 노니는 것을 보면 고것 참 이뻐 죽겠다느니 전혀 다른 소리만 해대었다. 늘 그런 식이 었으니 둘째 아들은 자기대로 금전적 지원은 해주지 않으면서 묻기만 하는 박영감에게 섭섭함이 있었다. 그래서 박영감이 계획을 물어올 때면 부아가 일어 그만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둘째 아들이 찾아와 금전적 지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박영감을 바라볼 때면 박영감은 잘라 말하고 돌아서기 일쑤였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재산은 안돼."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손주를 빨리 보고 싶어 했던 박영감에게 떡하니 손주를 안겨준 것은 또 둘째 아들이었다. 박영감은 두 자식 모두에게서 손주를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박영감은 아직 옛날 사람의 인식이 남아있었던지라 기왕이면 첫째 아들에게서 손주를 먼저 보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첫째 아들은 스스로 일어선 게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손주를 안겨줄 생각이 없는 건지 영 시원찮은 구석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영감은 명절 때마다 가족이 모일 때면 사람은 고로 나이가 차면 대를 이을 생각을 해야 한다느니 옆 동네 이 노인은 장손을 봤는데 고놈이 아주 귀엽다느니 빙빙 돌려 장손을 보고 싶음을 피력해 왔던 것이다. 명절 때마다 이런 상황인지라 첫째 아들은 이번 명절 때는 병원에 환자들이 많다는 핑계로 잠깐 얼굴만 비추고 올 요량으로 이른 아침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장손을 재촉하는 박영감의 말이 듣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효자인 첫째 아들로서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더라도 진짜로 병원에 환자가 많기도 했다. 그래서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명절 때 환자 한 명이라도 더 돌보고 잔소리도 피하고 첫째 아들에게는 일석이조의 방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번 명절에는 둘째 아들네만 아침 일찍부터 와서 박영감을 맞아주는데 박영감은 올 때마다 은근히 금전적 지원을 바라는 둘째 아들놈보다는 손주를 반가워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는가."
그리고 사업을 한답시고 만날 금전적 지원을 바라는 둘째 아들놈 들으라고 이제 막 다섯 살 된 손주에게 늘 한다는 말이
"사람은 자기 힘으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거야. 알았지? 이 담에 커서 그리 해야 돼. 알았지? 우리 강아지. 허허"
이런 식이었다.
둘째 아들은 지원은커녕 재산 구경조차 시켜주지 않으면서도 올 때마다 자기 들으라는 듯 손주에게 저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서러워 평소 같으면
"아버지는 얘가 몇 살인데 벌써 그런 말씀 하세요?"
라는 식의 원망 섞인 한 마디를 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둘째 아들은 코딱지만큼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저런 소리를 듣는 것이 서러워서라도 이번에는 대놓고 사업에 돈 좀 보태달라고 할 요량으로 평소와는 달리 조용히 듣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런 낌새를 알아챈 박영감도 조용히 손주를 마당에 나가 놀라고 내보내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미 작정을 한 둘째 아들은 얼른 박영감을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박영감은 금전적 지원 얘기만은 막을 요량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둘째 아들을 쏘아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 엄한 표정에 그냥 물러났을 둘째 아들이지만 오늘은 그도 단단히 마음을 먹었기에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박영감의 그 쏘아보는 표정이 워낙 완고하고 엄해 보여 그도 대놓고 얘기를 꺼내진 못했다.
"저, 아버지 요새 건강 괜찮으시지요?"
"건강하고 말고."
그렇게 대화는 끝나고 한 1분이나 정적이 흘렀을까 박영감의 눈치를 살피던 둘째 아들은 조심스레 금전적 지원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 아버지. 사업이란 게 돈을 투자하면 그냥 생돈 날리는 게 아니고 그만큼 뽑아내면 되는 거니까요. 아니 몇 배로 뽑아낼 수도 있는 거니까요."
박영감은 눈을 감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한 7천만 원 정도만.."
7천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박영감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돼. 결국 재산을 달라는 말 아니냐. 나도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해서 이렇게 만든 거야. 너도 손만 벌리지 말고 스스로 해봐."
그렇게 대화는 끊겼고 잠깐 정적이 감도는 사이에 손주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주는 작은 사탕 통을 박영감에게 건네며 뚜껑이 안 열리는지 열어달라는 시늉을 했다.
손주가 건넨 사탕 통에 흙이 잔뜩 묻은 것을 보아하니 안의 사탕은 다 빼먹고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다 통에 흙을 담아 놀고 있던 모양이었다. 재산 얘기를 하던 와중이어서 조금은 격앙돼있던 박영감도 손주를 이뻐하는 마음에 뚜껑을 열어주려 했다. 그런데 이 뚜껑이 쉽사리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얼굴까지 찌푸려가며 힘을 주어 한참 뚜껑을 당기던 박영감은 뚜껑이 열릴 기미가 보이자 순간 힘을 꽉 주어 뚜껑을 당겼는데 뚜껑이 열림과 동시에 눈에 무언가 팍 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통에 들어있던 그 손주가 꾹꾹 힘주어 눌러 담은 흙. 그 흙이었다.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통증이 느껴져 눈을 부여잡고 있던 박영감은 순간 아차 싶었다. 눈에 흙이 들어가면 재산을 준다고 자식들에게 늘 말해 왔는데 진짜로 눈에 흙이 들어갔던 것이었다.
흔히 시쳇말로 하는 말인 눈에 흙이 들어가면, 즉 수명이 다해 세상을 떠날 때를 뜻하는 말로 재산 얘기가 나올 때면 박영감이 즐겨 쓰던 말이었는데 평소 농담으로라도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그였기에 지금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아파서 흐르는 눈물인지 아니면 재산을 주어야 하기에 흐르는 눈물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쩔 줄 모르는 어린 손주는 그저 박영감을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연이어 불러대며 괜찮냐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통증이 차차 가라앉자 박영감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눈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사실 아픈 것은 진작에 가라앉았으나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는 것은 다 재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박영감은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사업을 위해 지원해 주기로 했다.
박영감은 안방에서 홀로 말없이 가훈이 담긴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고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사업 지원을 할아버지로부터 받아 낸 손주는 영문도 모른 채 마당에서 강아지를 안고 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