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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민 May 27. 2021

「The Old Man's Diary」

단편 네 번째

     젊었을 적 사진도 지갑에 넣고 다녔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

내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니까 지금을 온전히 즐기고 한시라도 아쉬움 없이 보내야 하는데 자꾸 미련만 남는 것 같아서 이젠 지갑에서 빼버렸어. 그리고 그 시절 사진 보여주면서 자랑하는 일도 이제 재미없어. 그래서 서랍에 그냥 넣어놨어.     


‘지금 내 지갑에는 지금을 사는 나에 대한 것뿐이야. 아 참, 손주 사진도 있지.’     


뭘 해도 예전같이 재미가 없어. 이러면 안 된다는데 허허 참, 주말 노인 영어반도 이제 안 가고 싶어. 서노인이 영어 단어 좀 잘 안다고 잘난 척해대는 그 꼬락서니를 보면 아주 징그러웠는데 이제 아파서 못 나온다고 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막상 서노인 없으니 허전하기도 하고 그래. 허 참. 안 가는게 좋겠어 이제

     

엊그저께는 손주가 좋아하는 햄버거 사다 주려고 햄버거 가게에 갔더니 직원들은 주문받은 거 내오느라 정신없고 주문은 따로 안 받데? 이거 바쁜 사람들 붙들고 이러쿵저러쿵 하기 미안해서 둘러보니까 뭐 다들 기계로 주문을 하더구만. 허허 이거 근데 쉽지가 않아. 이 영감은 기계로 주문하는 거 잘한다고 만날 자랑해 쌌더니만 직접 보니까 이거 자랑할만하네 그려 허허

이 영감 자랑할 때마다 콧방귀나 뀌어댔는데.. 이 영감 대단하구만.. 하하 이거 난 무리겠어. 그래도 손주에게 햄버거 먹일 생각만으로 줄 섰다가 몇 번 눌러봤는데 안 되겠더구만. 이것도 눌러보고 저것도 눌러보고 하면서 한참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뒤에 사람들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거 미안해서 어디 붙들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허허 그냥 나왔어. 눈물이 살짝 돌더라고 이런 때에 눈물 날라 하는 건 나이 들어도 단련이 안돼. 아 청승맞다 할까 봐 눈물 흘리진 않았지. 잘 참은 거 같아. 이제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으니 내 스스로 해.      


‘눈물은 흘리지 않았어. 참 장하구만 그래.’


그렇게 잠깐 걷다가 그냥 손주 선물이나 하나 사 줄 생각으로 조그만 가게에 들렀는데 우리 손주 좋아할 만한 거 뭐 없나 한참을 둘러보니까 주인 양반이 찾는 거 있냐고 퉁명스레 묻네 그려. 뭐 살 걸 마땅히 정해놓고 들어온 건 아니니까 대답할 말은 없지만서도 이왕 물어오니까 대답은 해줘야겠지. 그래 조카가 좋아할 만한 거.. 곰인형! 이런 가게에 곰인형 없을 거 뻔히 알면서 여기서 묻는 것도 웃기네 하하. 이 나이까지 살다 보면 이렇게 되나 싶어. 나도 젊었을 적엔 안 그랬는데 이거 갈수록 왜 이러는지 참 내.


 ‘미안하네 주인 양반, 너무 그렇게 보지 말게. 이제 나가려던 참이네.’     


아이고, 걷다 보니 이거 너무 힘들구만 여기 벤치에 좀 앉아야겠어.

공원에서 노니는 사람들 보면 정말 평화롭고 좋아 보여. 아 정말 평화롭구만 그래.

사람 사는 세상이란 이래야 해.     

.

.

.

몇십 년 전 같은 동포들끼리 총 들고 싸웠지? 그때 나도 거기 있었어.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지금도 가끔 귀에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천둥번개 보다도 큰소리야. 아휴 그럴 때면 나는 식탁 밑에라도 들어가 있어야 마음이 편해질까 싶어.

이런 얘긴 왜 하냐고? 내가 여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참전 기념비 앞을 지나는데 참 거창하게 만들어 놓은 거 보면은 자랑스럽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고 그래. 나도 그때 거기 있었으니까. 그런데 전쟁터에 가봤으면 알 터인데 전쟁은 솔직히 자랑스러운 거랑은 거리가 멀어. 멋있고 그럴 거 같은가? 전혀 그런 거 없어. 지저분하고 참혹하고 그런 거밖에 없어. 정말 참혹하기가 이를 데 없다고. 큰 포탄이라도 쾅하고 터지면 영화처럼 사람이 날라가고 피 흘리고 아니면 어디 팔다리 떨어져 나가고 그럴 거 같은가? 큰 포탄이 떨어지면 말이야. 포탄 떨어진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냥 없어져. 땅은 푹 꺼지고 사람은 없다고. 나중에 그 근처 보면 어디 나뭇가지 같은데 살점 일부가 널려 있고 그렇다고. 아후 이런 얘기 그만하지. 그리고 이 기념비 앞은 내가 웬만해선 가지 않으려 해. 왜냐하면 말이야. 전쟁에 몸 바친 혼령들이 여기 와서 쉬다가 내가 지나가면 나를 붙드는 것만 같아서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발이 무거워지는 거 같은 게 꼭 혼령들이 나를 붙드는 것 같은 기분이야.

그래도 힘내서 걸어야지. 손주 좀 더 보려면.     


'이보게들 난 아직 아닐세. 좀 더 천천히 보는 걸로 하세.'   

  

이거 이제 거의 다 왔구만. 드디어 손주 볼 시간이 된 것 같네. 나중에 또 얘기하세.     

  



박영감은 책상을 정리하다 작은 옛날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외형만 봐서는 분명 익숙지 않은 수첩인데 보관에 신경을 쓰려했던 것인지 비닐에 싸여있었다.     


‘내 거 같지는 않은데 무슨 수첩이지..’     


이내 비닐을 뜯어내고 수첩을 펼쳐보니 일기인지 마치 독백하듯 쓰여 있는 글이 있었다. 글씨체는 분명 자신의 것인데 영감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언제 이런 걸 적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구만..’     


박영감은 미간을 찌푸리며 수첩을 한참 보고 있자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것은 TV에서 치매 예방에 좋다고 소개한 방법으로 일기처럼 또 독백처럼 일상이나 떠오르는 것들을 이것저것 적어 놓았던 수첩이었다.     


‘이제 기억나는구만, 아 근데 수첩에 제목이 없네 그래. 제목 하나 있었으면 쓰겠는데..

거 그냥 노인네 일기라고 하지 뭐.’     


박영감은 책상 한켠에 굴러다니던 볼펜을 집어 들고 제목을 적었다.     


「노인네 일기」

    

제목이 적힌 수첩을 들고 한참을 응시하던 박영감은 이내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나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해보니 제목이 너무 초라한가? 근데 노인네가 썼으니까 노인네 일기가 맞는 거지 뭐, 하 그래도  좀 그러네. 뭐 좋은 거 없을까..’     


창밖을 보며 조용히 서 있던 박영감은 무언가 생각난 듯 수첩으로 책상을 경쾌하게 탁 내리치더니 매직을 들고 와 수첩 위에 큼지막하게 적었다.

     

「The Old Man's Diary」     


‘음, 맞게 썼는가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이제 좀 폼이 나는구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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